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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도현 칼럼] 욕망을 좇는 인생
    안도현 목사 (아름다운교회) [프로필] ▣ 순복음 신학교 교수 ▣ 前 일기연, 42대 고양시기독교연합회장 ▣ 사랑이 있는 마을 담임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 2:1) 솔로몬은 왕이 되어서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욕망을 좇아 모든 일을 다 해보고 싶어 했습니다. 솔로몬은 시험 삼아 낙을 추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어떻게 살면 행복지수가 높아질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솔로몬은 결국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헛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잠깐이건 영속적이건 또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것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 밖에 없고 시험적으로 살아볼 만큼 길지도 못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시험적으로 해보며 방황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젊을 때는 마치 인생이 무한한 것처럼 느껴져서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 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원해도 건강이 받쳐 주지 않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욕망을 좇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시간과 정력과 재력만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솔로몬은 너무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전도자의 위치에 서게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세상의 진귀한 음식들이 로마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보다 맛있는 것,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을 실컷 먹자는 것이 로마 사람들의 신조였습니다. 그들은 축제가 열리면 며칠 동안 계속 먹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으면 토하고 또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칠 줄 모르고 먹고 마심으로 결국에 병이 나고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부정적인 전철은 피하고 긍정적인 앞날을 개척하는 거울로 삼고자 함에 있습니다. 로마가 망한 이유 중에는 로마인의 음식에 대한 사치를 제국이 감당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면서 먹고 또 먹습니다. 회식 때가 되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제할 줄 모르고 탐식하고 과음하는 사람은 그들의 배가 신입니다(빌 3:19). 뷔페 음식점에 가면 수많은 음식으로 인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맛있고 특이한 음식이 아무리 다양하고 많아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어서 어느 정도 먹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면 수많은 장난감 앞에서 아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이것도 가지고 싶고 저것도 가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장난감 가게 전체를 갖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장난감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너무나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문제는 우리 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고 하고 싶은 것은 많을 때 사람들은 잠을 줄입니다. 그러다가 별로 건지는 것도 없이 몸만 병들고 가까운 사람들만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욕망을 좇는 삶의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헛되다고 한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욕망을 좇는 삶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일일이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내려진 결론입니다.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사람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오직 답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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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도현 목사
    2022-12-30
  • [조예환 칼럼] 호떡의 추억
    조예환 목사(갈보리교회) [프로필] ▣ 총회부흥사회 대표회장 역임 ▣ 한국기독교영풍회 대표회장 역임 나의 학창 시절엔 등하굣길이 버스가 아주 만원이었다. 버스 문도 못 닫을 정도로 사람을 많이 싣고서 안내양이 양쪽 손잡이를 잡고 무자비하게 밀어 넣어서 차를 출발시키면 버스 기사가 운전을 험하게 해서 버스를 흔들어서 골고루 자리가 잡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운행을 했었다. 탈 때도 그렇게 힘이 들지만 내릴 때는 더 힘이 든다. 가방이 사람들 틈에 끼여서 같이 못 나오는 경우가 많아 창문으로 가방은 던지고 내리는 일도 있었다. 남학생 가방은 양쪽으로 뚜껑이 있고 가운데 실내화 주머니를 넣게 되어 있었는데, 그날도 너무 사람이 많아 내려야 하는데 가방이 나오질 않아 확 잡아당겼더니 가운데가 쭉 찢어져 한쪽은 버스에 남은 채 버스는 가버리고 내린 내 손에는 반쪽만 달려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시락 쪽이 나왔다는 것이다. 교과서가 든 쪽은 버스에 실려 떠나가 버렸다. 다시 가방도 책도 사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는 반쪽짜리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다가 드디어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다. 매일 같이 혼나고 벌서고 맞으면서도 나는 가방과 책을 사달라고 집에 말하지 못했다. 말해봐야 사주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학교에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때는 학교는 꼭 가야 하는 줄 알았다. 더구나 사춘기였던 것 같다. 한참 자라는 중이어서였을까? 늘 배가 고팠다. 배고픔도 지치는 것인데, 학교에서는 매일 벌서고 집에 오면 부업을 해야 하고 고생스러운 상황들이 힘들어서 매우 우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화를 내거나 투정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현할 환경도 표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외출을 하셨다. 별로 말이 없던 나는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기대 없이 그저 아버지 뒤를 따랐다. 동네를 벗어나서 아버지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오늘 아버지가 다 사줄게, 말해봐 ”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께 받은 유일한 혜택이다. 계속되는 아들의 우울한 사춘기를 아버지가 알고 계셨던 것일까. 나는 호떡이 먹고 싶다고 했다. 중국집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탕수육이나 자장면을 다들 가족과 먹는다고 했는데, 왜 하필 호떡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아마 그때도 가정 형편을 먼저 생각해서 가장 싼 것을 고른 게 아닌가 싶다. 실컷 먹으려면 값싼 것이어야지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가난은 그렇게나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길거리 호떡 포장마차로 갔다. ‘실컷 먹으라고 하셨지.’ 지금은 종이컵에 호떡을 주지만 그 시절에는 은쟁반에 작은 집게로 호떡을 먹는 것이다. 나는 계속 먹고 또 먹었다. 호떡 장사 아저씨의 손이 분주하다. 가난으로도 배가 고팠지만, 사춘기를 지나는 마음이 그렇게나 공허했던 것 같다. 스무 개를 먹고서야 집게를 놓았다. 배도 부른지 몰랐고 마음이 채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나는 다시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에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돌아보면 호떡을 스무 개나 먹던 그때의 배고픔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할,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허기짐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나는 호떡을 좋아한다. 꿀 설탕이 듬뿍 들어 잘못 먹으면 옷을 버리게 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뜨거운 꿀이 입 안에서 녹을 때의 달콤함이 너무 좋다. 이제는 많이 먹어도 겨우 3개를 먹을 것이다. 스무 개의 호떡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그 공허함과 힘겨우면 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거듭남의 체험으로 깨끗이 해결되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니 다시 그렇게 공허하지 않았다. 가슴 밑바닥 깊이부터 허기지던 허전함도 목마름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고통과 가난과 아픔과 상처는 내 속에 가난이 준 기억이란 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공간이 있어서 나는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고, 더욱 감사할 수 있다. 만약 환경에서 사랑과 여유가 나오는 것이라면 나는 사막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극한 어려움 속에 자랐어도 나는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인 게 좋고 용서와 사랑이 날마다 샘솟는 것은 기적이 아닐까?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난했기에 가난을 공감한다. 이것이 또한 가난이 준 아픈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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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예환 목사
    2022-12-30
  • [함정호 칼럼]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요 15:6)
    [프로필] ◈ 영화교회 담임목사 성도가 구속과 진리영감, 믿음을 떠나면 주님의 보호, 인도, 도우심, 축복이 단절된다. “바로 아는 지식이 말라진다.” 지식은 하나님의 참지식과 마귀의 거짓 지식이 있는데 하나님과 끊어지면 참 지식은 말라지고 사망지식으로 채워진다. 그리하여 자기를 해칠 사람은 유익을 줄 사람으로, 유익을 줄 사람은 해칠 사람으로, 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필요 없는 줄로, 필요 없는 일은 자기가 해야 할 일로 거꾸로 알게 된다. 사람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취급하지 못하고, 희노애락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 시관이 뒤바뀐다. 자기와 자손만대를 망치는 가장 독스런 선악과는 생명과로 보이고 생명과는 선악과로 보여 하나님 떠난 첫 아담은 멸망했다. 하나님 떠나니 “정녕 죽으리라”는 참지식은 증발해 버리고, 마귀, 사망지식으로 채워져 멸망했다. 고로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하셨다. “바로 아는 지혜가 말라진다.” 지혜는 자기가 가진 지식에서 나온다. 지혜는 살리는 하나님 지혜와 죽이는 마귀 지혜가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지식에서 후자는 마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혜는 자기의 현재 현실과, 미래를 대처하고 준비하는 지능이요, 기능이다. 고로 바로 아는 지혜가 말라진다는 것은 자기나, 자기 가정, 자기 국가, 자기 세계의 현재 당한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바로 대처하고 예비할 지능이 말라지는 것이다. 노아시대 사람들같이 미련한 다섯 처녀같이 현재와 미래를 바로 대처하지 못해 대비하고 방비한 것이 헛일이 되고 멸망함으로 골만 빠졌다. 그러나 슬기있는 노아 가족과 다섯 처녀는 방주와 기름을 준비함으로 구원받았다. 미래적 영감 속에산 자들이다. “권위가 말라진다.” 바로 아는 지식이 증발하니 바른 지혜가 증발하고 바른 지혜가 증발하니 자기 현실과 미래를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하니 죽는 선악과를 먹었고 방주 준비, 기름 준비를 못해 다 실패하고 멸망했다. 이같이 하는 일마다 죽고, 실패만 하고 헛일만 하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 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권위가 자꾸 떨어져 무능자로 취급받게 된다. 이 사람의 지도와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 않고 무시한다. 이와 반대로 하는 일마다 성공하면 모든 사람이 배우려 하고 권위가 자꾸 올라간다. “참 사랑이 말라진다.” 참 지식 지혜가 말라지고, 사이비한 마귀의 사망지식이 채워지면 이 지식과 지혜가 잘못되고,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는 상대방을 진정 위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 가서 보니까 빈 놀음만 하고 속인 것 뿐이요, 해를 끼친 것 뿐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을 사랑하여 남편에게 주었으나 이것은 남편을 죽이는 것이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받지 않는 것은 다 해인 것같이 성도는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은 다 해인 것이다. 참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다 죽이는 사랑이다. “불에 던져 사른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짓밟힘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지식 지혜가 잘못되고 비뚤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잘못되고, 비뚤어졌고, 위한다는 것이 속였고, 유익 준다는 것이 해를 주게 되니까 권위가 떨어지고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맛 잃은 소금같이 교회 안팎에서 멸시, 천대, 조롱을 받는 자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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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정호 목사
    2022-12-29
  • [임동훈 칼럼] 57. 스토케이아
    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스토케이아(Stoicheia)는 세상의 ‘초등 학문’이다. 조상의 전통이나 사회 통념 등 기초 원리에 근거하지만 근본 진리가 아니다. 피조 세계의 ‘하찮은 권세들’로서 그 법과 원칙을 앞세워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유지, 보존되고 있으며, 혼돈과 혼란의 세상을 질서와 조화로 바꾸는 순기능의 역할도 수행한다. 하지만 타락한 그들이 권세를 오남용함으로써 악마의 화신이 되었다. 이른바 양의 탈을 쓴 이리 들로서, 자기 가족이나 종족 등 이해관계 집단을 위해 이용하며, 선을 악으로 갚고 악을 선으로 바꾸기도 마다치 않는다. 종교적 극단주의, 무속 신앙에 찌든 자들이 더욱 악랄하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무장은 해제되었으나 긴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미신에 빠지지 말라는 예방적 방편이요, 제방의 역할이다. 실로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우주의 원소보다 많고 더 다양하다. 비록 하찮은 권세들이나 그 훼방까지도 역이용하신다는 뜻이다. 2003년 5월, 3개월간의 인건비와 월세, 공과금은 물론, 부대비용까지 생돈으로 들어갔다. 다시 웃돈 1,000만 원과 수고비 200만 원을 주고 갈현동 빌라와 교환하였다. 응암동 카페를 처분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더욱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건축주가 1억에 전세를 놓아주되, 1,000만 원은 되돌려 준다는 조건이었다. 고수의 고차원 전술이었다. 곧 나간다는 전세는 3개월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자 융자금 7,000만 원을 안고 2,000만 원을 추가로 부담하여 소유권을 넘겨받으라고 하였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시세도 낮았다. 카페는 넘겨주었으나 빌라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1,000만 원을 포기하고 다시 웃돈 1,000만 원과 수고비 200만 원을 주고 제주도 주택과 교환하였다. 고수가 책임지고 팔아준다는 조건이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너무 꼬여 고수만이 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집 나간 탕자처럼, 알거지가 되어 아버지께 돌아올 때까지, 나는 그 지겨운 돼지치기를 계속하였다. 알고 보니 제주도 주택도 그 빌라 주인의 것이었다. 고수가 노숙자를 내세워 하수에게 전매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집은 전 소유자의 융자금 3,000만 원과 가압류 등이 포괄 근저당 된바, 그 채무가 집값을 넘어 이전을 포기하였으며, 그도 빌라가 분양되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그 집과 교환한 후 낭패를 보았고, 불경기로 집값까지 떨어져 애물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즈음 그 집의 건축주가 도로 지분의 자기 땅을 팔기 위해 가압류를 설정하였다. 하수의 수렁은 끝이 없었다. 하루는 고수가 불러 다정히 권하였다. “건축주가 350만 원을 요구하니 200만 원만 내세요. 내가 150만 원을 부담하여 가압류를 풀고 팔아주겠습니다. 손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압류를 말소한 후 저당권을 승계하려고 은행에 갔다. 직원이 차분히 설명하였다. “채무자가 신용불량자입니다. 그의 카드대금 500만 원까지 갚아야 합니다. 집 시세가 800만 원입니다. 2,700만 원을 상환해야 합니다.”아, 무지의 장막!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욥의 아내가 조용히 나섰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욥기 2:9)오, 세상 풍조를 따라 욕심이 잉태한 자여! 공중 권세를 쫓아 죄가 장성한 자여! ‘속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갈라디아서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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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동훈 목사
    2022-12-29
  • [최원석 칼럼] 더 밝은 아침을 향하여
    최원석 목사(서울중앙교회) 겸손은 뒤처지고 온유는 약해보이고 진실이 힘을 못쓰고 성실이 대접받지 못하고 믿음은 의심스럽고 사랑은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밤이 지나갑니다. 야곱의 밤을 지나 이스라엘의 아침으로 골고다의 밤을 지나 새로운 생명의 아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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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석 목사
    2022-12-29
  • [문미향 칼럼] 소싯적의 크리스마스
    문미향 사모(주님기쁨의교회)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밤새 눈이 내려온 동네, 온 세상이 다 하얗게 설국으로 변해있었다. 어린 소견에도 세상이 밝고 환하고 갑자기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신비하고 멋진 겨울 아침을 선물로 받은 듯했다. 큰 눈송이로 찰진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펑펑 내리는 날은 포근했다. 예나 지금이나 겨울에는 눈이 와야 맛이고 멋이다. 털모자와 오버 코트 어깨 위에도 하염없이 눈이 쌓이고 이걸 계속 흔들어 털어가며 등하교를 할 때면 행복했다. 쉬는 시간엔 모두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눈을 뭉쳐 눈싸움을 했다. 설원을 닮은 넓은 운동장은 우리들의 겨울 왕국이었다. 앞이 안보이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사람이 되어 집에 가면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가 수건으로 탈탈 털어 주는 것도 재미였다. 어릴 때 집 근처의 작은 교회를 다녔기에 성탄 축하의 밤에는 늘 춤(율동)을 추고 성극에 참여했다. 성탄 이브 날 오전 총연습 리허설까지, 한 달 넘게 매일 교회에 모여 연습을 했고 집으로 갈 때는 뜨거운 호빵과 귤 한 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자다가 멀리서 찬송 소리가 그야말로 고요한 정적을 깨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들려오면 눈이 번쩍 떠졌다. 왔다! 우리 집 앞에 점점 가까이 들리던 잡담이 잦아들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리면 우리 가족 모두 불을 켜고 일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그 당시 교회를 방학하고 세상에 속해 있었지만 우리 집에 천사가 온 듯, 반갑고 고맙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뻐하셨다. 그러나 옷을 입고 달려 나가는 사람은 큰 딸인 나였다. 대표로 나가 수줍게 웃으면 꼭 말하지 않아도 다 통하는 뭐가 있었다. 목사님 아들이었던 젊은 선생님이 내게 오히려 과자를 한 아름 안겨 주셨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성탄을 준비하고 발표회 끝난 후 대학청년부는 교회의 난로 주변으로 둘러 앉거나 친구(집사님댁) 집에 우르르 몰려가곤 했다. 성탄절은 부모님이 암묵적 허락한 ‘외박의 날’이었으니 더 해피했다. 방안에 이불을 펴고 그 속에 발을 넣고 둥글게 모여 앉아 밤새 시끌벅적 올 라잇(All Night)을 했다. 돌아보니 그때 집사님 부부는 밤새 노는 우리의 젊음을 흐뭇해하셨을 것 같다. 밤새 수다를 떨며 깔깔대고 힘 좋게 놀다가 시간 맞춰 새벽송을 돌았다. 살짝 피곤한 몸으로 오전에 주일학교 예배와 장년 성탄 예배의 성가대를 섰는데 날밤을 새고 졸음을 참고 드리는 매년 성탄 풍경은 어쩐지 안 좋은 것 같아 자책하곤 했다. 겨울은 춥지만 오히려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발이 푹푹 빠지게 눈이 아주 많이 오기를 소원하고 지금도 새하얀 눈밭에 굴러보고도 싶지만 사실은 다 마음뿐이다. 도시에 눈이 그렇게 많이 내려도 안될 것 같고 빙판도 위험하니 그저 따뜻하게 겨울을 나면 족하겠다. 옛날에는 성탄 트리의 앙증맞은 전구들이 반짝이고 성탄 카드를 쓰고 캐럴이 흐르는 거리에 인파로 북적이면 절로 흥이 났건만, 이젠 눈도 별로 안 오고 카드도 안 쓰고 캐럴도 안 들린다. 저작권료나 생활 소음 때문이라나? 앙꼬 없는 찐빵이다. 군밤 장수도 안 보이고 군고구마 파는 곳도 없고 거리의 철판구이, 붕어빵도 보기 드물다. 그 뜨거운 맛이 꿀맛이고 제맛인데. 이제는 처마 밑의 고드름도 볼 수 없고 모든 게 눈 녹듯이 다 사라진 것 같다. 마음은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꾼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로 내 누추함과 상처와 죄악을 다 덮고 그저 흰 눈처럼 맑고 깨끗한 순전한 마음을 바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탄의 계절에, 한 해를 마무리하며 주위를 돌아보고 어렵고 힘든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연말연시가 되면 좋겠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임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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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미향 사모
    2022-12-29
  • [송용필 칼럼] 성화의 과정(히브리서 3:1~6)
    송용필 목사 [프로필] ◈ KAICAM 고문 어떤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새로 가게를 오픈했습니다. 그는 감사 예배를 드리고 싶다며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업가가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며 굿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아니 성도가 고사를 지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게다가 고사를 지낼 것이라면 도대체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성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귀신도 도와주고 하나님도 도와주면 좋지 않습니까?”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상항이지만 실제로 30%가 넘는 기독교인들이 연말에 점을 보거나 운세를 보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부터 6절에는 구약의 모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명을 받은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선지자들보다 뛰어나고 의미 있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가장 귀하신 분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본문의 처음부터 계속해서 예수님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 비교의 대상은 다르지만 결론은 모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주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요 1:17) 둘째,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데,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십시오.(눅 22:19) 셋째, 주님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생애를 되새겨 볼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행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알고 신실하게 그 사명을 감당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되고 그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고 쓰임 받으십시오.(히 12:3)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생각할 때, 주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더욱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는 하루를 사십시오. 주님! 예수님의 향기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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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송용필 목사
    2022-12-29
  • [소강석 칼럼] “얼마나 비우고 낮아져야 할까요?”
    “... 얼마나 비워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 얼마나 가슴 저려야 하겠습니까 /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캄캄하기만 한 밤 / 언제쯤 그 별빛을 비추어 주시겠습니까 / 평강의 왕으로 오셨던 아기 예수여 / 증오와 분노가 가득한 어두운 이 세상에 / 다시 맨살의 아기 예수로 오셔야 하겠나이다... (중략) 상처와 아픔, 분노와 증오가 가시지 않는 / 조국 대한민국에 하늘의 별을 들고 오시옵소서 / 벌거벗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 따스한 화해의 등불을 켜고 오시옵소서...” 이는 제가 국회 성탄트리 점등식에서 낭송한 시의 일부분입니다. 점등식에 앞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성탄감사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성탄절, 대화해의 절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만큼 평화와 화해가 절실한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야가 대화하고 협치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극한 갈등과 대치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야 크리스천 의원들은 정쟁을 하다가도 예배실에서 기도하다 만나면 손을 잡고 함께 극한 대립의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극적 대화와 화합, 협치의 길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국회조찬기도회도 그래야 합니다. 기독 의원들이 하나 되어 예수님의 화해와 화목의 정신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김진표 국회의장님도 이런 축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맞아 우리 국회가 대립과 갈등을 넘어 대화와 타협의 국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채익 의원(국회조찬기도회 회장 국민의힘)과 김회재 의원(국회조찬기도회 부회장, 민주당)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어 국회 분수 대광장에서 진행된 성탄트리 점등식에서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여야의 국회의원님들과 성도들이 함께 모여 아기 예수의 성탄을 축하하며 사랑과 평화의 불빛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불을 밝혔습니다. 성탄절은 사랑과 평화의 구주, 예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탄이야말로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러브 스토리요, 러브 레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만의 화해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 사건이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일 뿐 아니라, 대화해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초갈등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미움과 증오의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왕국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온갖 거짓과 증오의 말들이 난무한 세상입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와 인포데믹을 남발하며 미움과 증오를 부추기고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거짓과 증오의 욕설을 쏟아내며 갈등과 분노를 부추깁니다. 여기에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제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한국교회에 불이익을 주고 공적 피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신문 신년인터뷰를 할 때 김재일 장로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시인으로서 감성이 여리고 상처 받기가 쉬우실 텐데 어떻게 이런 것을 극복하십니까?” “당연히 그런 것만 생각하면 여린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저의 마음을 주님께 연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연결된 아픔, 주안에서 느끼는 아픔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무를 하고 위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제 자신을 얼마나 비워야 하고 낮아져야 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꺾이지 않고 오히여 긍정에너지로 승화시키지요.” 사실, 아기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헤롯왕이 자신의 사욕과 탐욕에 눈이 멀어 무고한 아기들을 희생시켰지요. 20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거리에도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우리의 영혼을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낮아지고 비워야 할까요. 얼마나 더 가슴 저려야 할까요. 교회의 본질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고 섬기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정상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도 이념으로 나누어지고 분열의 카르텔을 쌓으며 동질집단의 권력화를 이루고 다툼과 분열을 일으켜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트러스트화를 보이는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가 예수님의 비하의 탄생과 삶을 묵상하며 더 낮고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초갈등사회를 화목사회로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진실이 전해지고, 진실한 사랑으로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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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12-25
  • [사설] 보다 진실된 사회를 만들자
    거짓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고 하는 말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세상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으나 유난히도 우리나라가 그 정도에 있어서 더 심한 것 같다. 정치인들의 거짓말, 자신의 말이 아닌 상대방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은 다 가짜요 속임수라는 말에서부터 거짓으로 재산을 빼돌려 국민과 정부를 속이고 세금 한 푼 내지 않으면서 호화생활을 즐기는 철면피 기업인들, 입에 발린 거짓말로 여신도들을 속이고 성폭행을 일삼은 종교인들까지 온통 주변이 모두가 거짓말로 도배가 되다시피 한 것 같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독 우리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시민단체로 위장한 고등 사기꾼들이 아닌가 한다. 시민단체, 혹은 NGO라고 하는 간판을 내건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순진무구한 백성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것이 현실이다. 환경운동을 한다느니 일제 강점기 위안부 여성들을 돕는다느니 명목도 구실도 가지가지다. 더 나아가 남북이 경색되어 교류가 전혀 없었음에도 수십억 원의 남북교류와 협력이라는 명목의 국민 세금과 후원금이 쓰였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나라의 시민(?)들이 한 일일까? 새해에는 좀 진실되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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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2-22
  • [사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마라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은 어쩌면 하기 좋은 겉치레 인사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2022년을 돌아볼 때는. 비록 우리나라의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있어 마음을 비우고 편히 앉아 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것과 견주기에는 좀 격이 다른 얘기지만, 북한의 핵 도발! 어이없는 일들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지는 일들이 연이어 줄을 이어 온 가운데 2022년 한 해가 작별을 고한다. 한 해가 저무는 때, 이럴 때 우리가 꼭 뇌리에 떠올려야 할 교훈이 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우리 주님께서 자천타천으로 주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손을 든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 중 하나이다. 쟁기로 밭을 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쟁기로 밭을 가는 농경시대의 정서가 남아 있다. 설혹 우리가 직접 경험을 해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쟁기로 밭을 가는 농부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가 밭을 갈다 말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밭을 가는 농부는 오직 앞에 있는 목표물을 보고 전진해야 밭이랑을 똑바로 일구게 된다. 얼마나 일을 했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쟁기가 돌부리에 걸려 부러질 수도 있고, 또 밭 가는 소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 밭갈이를 망칠 수 있다. 노련한 농부, 적어도 밭갈이 전문가 농부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번 목표로 정한 길을 가려 할 때 반드시 이 정신만은 갖추어야 하고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며 회고하고 정리를 하는 뜻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재미를 놓지 못하고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나간 한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다사다난했다 할지라도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은 다가오는 새해를 위해 다 털어버려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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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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