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 성지순례(21)

  • 입력 2018.07.05 12:05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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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수 목사
▣ 영월주님의교회 
▣ 전 터키 선교사

사데(헬라어 Sardis, 현지어 Sart)

사데 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자주 장사 루디아의 고향인 두아디라 시에서 차를 타고 하얗게핀 좌우에 목화밭을 지나 남동쪽으로 약 65㎞를 가다보면 신라의 왕릉과 같이 큰 무덤들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로 일명 ‘황금의 도시’라 부른다. 도심 한 가운데는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거대한 체육관이 자리 잡고 있고 건물 앞 한 가운데는 헬라시대의 아고라와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교 회당이 있다. 편, 해발 250미터의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투몰루스(Tumolus)산 아래의 계곡 사이에는 작은 시내가 흘렀는데, 사금이 많아 일명 ‘황금천’이라고 부를 만큼 많은 사금이 함유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서 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무려 300개 이상이 발굴되었다고 하니 이곳 도시의 부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곳이 바로 동화책에서도 언급된 ‘미다스’(Midas) 신화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대 리디아 왕국은 세계 최초로 금화를 만들어 이웃 도시국가들에게로 보급한 나라이자, 기원전 6세기에 이곳을 통치한 크로이소스(Croesos)왕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대 지역에 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부를 탐하던 페르시아의 고래스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지형적으로 난공불락과도 같은 요새를 인해 쉽게 함락하지 못하고 여러 날을 기다리며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크로이소스 왕은 자만심을 가지고 그들을 능히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백성들과 함께 늘 먹고 마시며 향락에 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경계근무를 서던 페르시아 병사 하나가 사대의 성곽에서 갑자기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성벽에서 경계 근무를 하던 사데 병사 한 명이 졸다가 쓰고 있던 투구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를 줍기 위해 사데 병사는 적을 의식하지 못한 체 성벽 아래로 뚫어진 구멍으로 내려와서 투구를 가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그 모습을 본 지혜로운 고레스 왕의 병사가 그날 밤에 그 병사가 나온 비밀 문을 통해 들어가 견고한 성문을 열고 이곳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사대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도적 같이 이르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한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이후로 사데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천혜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페르시아 제국이 소아시아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사데까지 2700여 km의 긴 길을 ‘왕의 대로’라 하여 이 도로를 통해 동서 무역과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는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Alexander) 대왕과 버가모(Pergamon) 왕국,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의해차례대로 점령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 17년에 있었던 소아시아의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폐허가 된 도시를 아쉽게 여긴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원조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과거의 영광의 모습이 재현되지 않았다. 도심을 지나면 투몰루스 산자락에 거대한 아르테미스신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된다. 비록 지금은 두 개의 기둥만 남아 있으나 규모로 볼 때 과거 이 도시에 우상숭배가 얼마큼 만연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편, 현재 사데 교회가 있는 자리는 아르테미스신전이 있던 언덕 위에 조그만 모습을 하고 있다. 4세기 로마 제국에 종교의 자유를 얻은 기독교가 이곳에 소규모 성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모양은 비잔틴 건축양식으로 둥근 돔을 하고 내부는 모자이크와 수채화로 그린 프레스코가 채색유리로 장식돼 있으며 외부는 장식용 벽돌로 되어 있다. 325년 니케아 제 1차 종교회의 때에 사데 교회에서 아르테미도루스(Artemidorus) 감독이 참석하였을 만큼 비잔틴 시대 초기에 이곳에 있는 사데 교회는 부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가 누리던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영적으로 세속화된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걸었던 길을 답습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사대 교회는 처음에는 영적으로 열심이 있었던 교회였으나 후에는 영적인 능력을 상실한 채죽어 가는 교회가 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대 교회를 향하여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하였던 것이다.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1 )

사데 유적지 입구의 진입로에는 오래된 석관이 하나가 순례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그 석관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석관으로 거기에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는 글귀가 있어 이곳을 찾는 성지 순례 객들에게 가슴 아픈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여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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