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하나님(고전 3:18~23)

  • 입력 2018.08.16 16:09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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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목사(서울중앙교회)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곤란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교회, 그리고 모진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줄 수 있는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에 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신 겁니까? 왜 뜬금없이 모세에게 창조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까?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한 광야를, 불뱀과 전갈, 알 수 없는 대적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사막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했다. 너희를 먹이고 마시게 할 만한 힘이 없겠냐.” 자랑하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곤고와 어려움을 겪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다.” 오늘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위로하려는 것이고, 살리려는 것이고, 다시 세우려는 것 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나아갈길은 어디입니까? 가인과 그 후예들은 참 대단합니다. 홀로 떠났는데 황무지를 개간하고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고 목축하는 방법을 배우고 기계와 도구도 발명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갈수 없으니 유리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면, 하나님을 놓치면 아무리 큰 자기만족과 칭찬이 있어도 결코 충만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인간됨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인간의 미래는 어디에의지합니까?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능력도, 자신의 인격도, 자신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님처럼 된다’는 그 길을 선뜻 나섰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좋은 대로, 내가 가고 싶은대로 가리라.” 아하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손길과 함께 갔을 때 정작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하고 자신의 지혜를 선택했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 정말 필요한 것은 내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나의 앞날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겁니다. 중심에 하나님의 자리를 남기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위로받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려라. 땅에 충만하라.” 그런데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여전히 노아에게 정복하고 지배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뒤에 덧붙이십니다. “짐승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에덴에서는 가슴 뛰는 감흥과 황홀이 있었지만, 홍수 이후에는 오히려 염려와 근심이 있었습니다.‘이제 사람 가는 모든 자리에 피가 흐르겠구나. 분열과 다툼과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구나. 두려움과 공포가 너희가 있는 자리마다 생기겠구나.’ 이미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자신의 유익, 자신의 판단을 따라 피 흘리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같은 축복인들 그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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