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한 내 방

  • 입력 2018.09.06 14:4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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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국 목사.jpg

고병국 목사 (한소망교회)  
[프로필]
▣ 협성대학교 신학과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졸업
▣ 서울남연회 강동지방 감리사 역임
▣ 온맘 닷컴 “목회칼럼” 연재
▣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은 세련되고 잘 정돈된 것을 좋아한다. 그런 곳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좀 지저분하고 어수선하다면, 보통은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혹 그런 곳에 누구라도 찾아오거나 들어온다면 흔히 하는 말이 ‘좀 누추합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지요.’ 한다. 내가 주로 머무는 곳은 교회 목양실이다. 집은 교회 밖에 있다. 집에는 주로 식사를 하거나 저녁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잠을 자는 곳이기도 하다. 그 목양실도 교회 옥탑 방이다. 이 교회로 올 때부터 옥탑 방이 목양실이었다. 4층인 셈이다. 승강기가 없는지라 하루에도 몇 번을 올라가고 내려오려면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한다. 옥탑 방인 목양실은약 7평 정도 된다. 목양실 한 면은 창문이 하나 있고 바로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다. 나머지 삼면은 책장에 책들이 꽂혀있다. 책장도 내가 이 방을 사용하기 13년 이전부터 있던 것이니 중고나 마찬가지이다. 목양실을 사용한 이후 모자라는 책장은 여기저기 사용하다 들어온 책장이다.

 

소장하고 있는 책도 내가 책을 구입하고 지금까지 데리고 다니는 수십 년 된 책들이니 책 특유의 쾌쾌한 냄새도 난다. 전에 어느 성도가 가져다 준 중고 의자, 중고 턴테이블과 오디오 시스템, 책상도 수 십 년이나 될법한 커다란 볼품없는 것, 거기다가 문서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노트북도 골동품 같은 삼보제품이다. 겨울에는 난방도구라야 이동식 열풍기 하나, 여름에는 선풍기로 가끔 사용하는 에어컨도 대우 벽걸이 골동품이다. 올해 신형으로 교체했다. 목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새로운 건물에 말끔하게 인테리어를 해서 보기에도 단아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아니라, 키가 서로 다른 책장에 책들도 색이 바래 누런색을 띄는 책표지가 있는가하면 잘 단장된 표지도 있는 책도 있다. 책장이 여백이 없어 여기저기에 책을 쌓아 놓기도 하고 그동안 설교문을 출력한 A4종이가 거의 사람 키만큼 쌓여 있기도 하다.

 

누가보아도 좀 어수선하고 산만하고 누추하다. 교회건물 자체가 38년 정도가 되었다. 한마디로 손님을 모시기는 좀 그렇다. 4층까지 힘들게 올라오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누가 오면 보통은 1층 사무실에서 만나고 차를 대접하곤 한다.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면 목양실로 잘 모시지 않는다. 혹 어떤 분이 목양실을 좀 보자고 하면 “누추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안으로 모시기도 한다. 그렇지만 누추한 내 방이 편안하고 참 좋다.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를 작성하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나를 다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마음과 정신을 예수정신으로 함양해가는 산실이기에 좋다. 이처럼 세련되고 잘 정돈되어 있으면 모르지만 누추하다면 개방하기가 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글을 남긴 선비가 있었다. 그는 허균(1569~1618)이다. 그의 산문 ‘누추한 내 방’의 글을 보자. “방의 넓이는 10홀, 남으로 외짝 문 두 개 열렸다. 한낮의 해 쬐어, 밝고도 따사로워라. 집은 겨우 벽만 세웠지만, 온갖 책 갖추었다.

 

쇠코잠방이로 넉넉하니, 탁문군(卓文君)의 짝일세.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대 피운다. 한가롭게 숨어 살며, 천지와 고금을 살핀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이라 말하면서, 누추하여 거처할 수 없다하네. 내가 보기엔 신선이 사는 곳. 마음 안온하고 몸 편안하니 누추하다 뉘 말하는가. 내가 누추하게 여기는 건, 몸과 명예 모두 썩는 것. 집이야 쑥대로 엮은 것이지만, 도연명도 좁은 방에서 살았지.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

(『누추한 내 방』에서 인용)

그렇다 누추하다고 할 때는 방안의 단정함도 아니고 세련됨도 아니다. 그 방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 정신이다. 조금은 덜 세련되고 잘 정돈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그 방안에 거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신이 건전하고 건강하다면 그 방은 누추한 방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최신 건축에 현대식으로 잘 만들어진 방이라도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과 정신이 건전하거나 건강하지 못하면 그것이 누추한 방이다.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라는 글귀가 여운을 남긴다. 그 군자를 예수정신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어떨까? ‘허균’이 말하는 ‘누추하게 여기는 것’의 소식을 여기저기서 들을 때 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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