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탈락시키지 마십시다(사사기 8:1~3)

  • 입력 2018.11.15 09:22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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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덕 목사(세인교회)

희망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몰트만 박사가 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면 이런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젊은이의 선연한 핏방울이 아로새겨진 십자가에 던져진 장미꽃들을 걷어내야 한다.” 신학대학교 학부 시절에 읽었던 이 글은 저에게 천둥이요 번개였습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행하는 일 중에 하나가 혹시 십자가에서조차 장미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40년전 신학생 시절에 읽었던 이 글은 근래 더 절절하게 기억에서 솟아오릅니다. 본문을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미디안 전투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으로 승리를 거둔 기드온 세력은 기쁨도 잠시 내홍에 휩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딴지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의 막판에 가세하여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미디안의 두 방백이었던 오렙과 스엡을 체포하여 그들의 머리를 잘라 기세등등하게 기드온에게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본문 1절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미디안 전투에 우리 에브라임 지파를 늦게 불러 승리의 전과를 평가절하시킴으로 소외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불만 제기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공격은 너무 얍삽한 짓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래서가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자기들이 선조로부터 획득해온 기득권의 혜택들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수를 친 것입니다. 7년 동안이나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시기동안 에브라임은 잠잠했습니다. 그 역사의 귀퉁이 어느 한곳이라도 미디안에 대한 항거와 저항을 했다는 보고가 사사기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고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그룹의 오렙과 스엡을 손쉽게 거머쥐고 그들을 죽였다는 한 가지 이유로 갖은 생색내기에 혈안이 없는 에브라임을 보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생각이 필자에게 스며들었습니다.

이런 에브라임 지파의 딴지 걸기가 못내 불편한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집중하고 동참하고 따라감으로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살아내는 자들의 공통분모인 십자가신학이 아닌, 그 부스러기만을 챙기려는 로버트 슐러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조엘 오스틴 식의 ‘긍정의 힘’과 같은 십자가 없는 신학으로 교회를 약화시키는 비 십자가 신학의 부류로서 에브라임 지파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에브라임의 겁박에 기드온이 반응한 본문 2~3절의 내용은 에브라임의 딴지걸기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타협을 보게 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무슨 의미입니까? 전쟁의 공로를 에브라임에게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공을 세우도록 당신들을 세웠다고 추어 올렸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도 훨씬더 훌륭하다고 비유하면서 에브라임의 불만을 누그러뜨립니다.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 훨씬 위대하다는 겉치레입니다. 그러자 어떤 결론이 났습니까?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기드온과 에브라임의 에피소드는 저들만의 해피엔딩의 리그로 끝났습니다. 분명히 해피엔딩인데 필자는 도리어 아팠습니다. 왜? 이들의 한 복판에 계셔야 할 하나님이 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데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탈락된 하나님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무대 정중앙으로 다시 모시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라고 지칭되는 C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또는 신들에게)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에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중략) 재판은 하나님의 무죄 방면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시다는 겁니다.”(홍성사 간, p,329,)

필자는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교회의 정 중앙에 하나님이 서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다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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