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지키는 나무

  • 입력 2018.12.13 12:05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병국 목사.jpg

고병국 목사 (한소망교회)  
[프로필]
▣ 협성대학교 신학과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졸업
▣ 서울남연회 강동지방 감리사 역임
▣ 온맘 닷컴 “목회칼럼” 연재
▣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무소유의 행복』이란 책을 읽다가 밑줄을 친 두 사람 이야기이다. 옛날 중국의 요 임금 시절에 허유와 소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친구였다. 요 임금이 허유에게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요 임금은 외딴 숲 속에 있는 허유를 찾아와 설득하였다. “그대가 나서야 천하가 잘 다스려질 텐데 내가 아직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 그러니 제발 천하를 맡아 다스려주시오”허유가 그 소리를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있음으로 해서 지금까지 천하는 잘 다스려졌습니다. 이제 와서 내가 그대를 대신한다면 나보고 명예를 좇으라는 말이오? 뱁새가 깊은 숲을 찾아도 결국은 하나의 나뭇가지에 의지할 뿐이요. 두더지가 강물을 마셔도 그 작은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는 몇 모금의 물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돌아가시오. 나에게는 이 천하가 아무런 쓸모도 없소”그리고 나서 허유는 친구인 소부를 찾아갔다.

 

그때 소부는 나무 아래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자고 있었다. 허유는 자신이 요 임금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그러자 소부가 몹시 불쾌하게 여기면서 허유에게 말했다. “어찌 하여 자네의 재주를 밖에까지 드러냈는가?” “내가 가진 재주를 세상에 드러낸 일이 없네” “쯧쯧, 그렇다면 요 임금이 어떻게 자네의 이름을 알았겠는가? 자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이제 그대는 내 친구가 아닐 세” 그 소리를 들은 허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허유가 물러가자 소부는 강으로 달려가 귀와 눈을 씻으며 탄식했다. “탐욕스런 말을 듣는 바람에 친구 하나를 잃게 되었구나!” 그 때 한 농부가 소를 끌고 강가에 와서 물을 먹이려다 귀를 씻고 있는 소부를 보았다. 농부가 소부에게 물었다. “왜 귀를 씻고 계시오?” “내 친구가 요 임금에게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들었답니다. 그 친구가 와서 그 얘기를 하기에 지금 더러워진 귀를 씻고 있는 중입니다” 그 얘기를 들은 농부가 소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는 없지요” 그러면서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갔다. 이후 소부는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여 허유와는 평생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온통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안 알아주면 안달을 한다. 마치 몰라주면 외톨이 같고 처진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고 무능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상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세상이 원하는 것은 나의 인품이 아니라 나의 “쓸모 있음”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쓸모 있는 사람치고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다간 사람은 별로 없다. 대개는 남에게 부림을 당하거나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쯤 가차 없이 버려지는 것이 그의 인생이다. 책 제목 중에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남이 알아주는 사람이야말로 수명이 짧은 사람이다. 일찍 베어져 죽은 몸으로 서 있느니, 차라리 몸을 낮추어 사는 것이 낫다. 사람이 나이 듦에서 오는 것 중에 하나는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기대심이다. 이것은 커다란 욕망이다. 이것과 싸우는 것이 인생에서 참 성공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모든 것에서 불행은 사실 무엇으로 인한 것인가? 욕심이다. 욕심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암초이다. 그런 암초 중에서 자기를 드러남으로 인한 욕망도 큰 암초가 된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조용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신을 낮추어 숲을 지키려는 못생긴 나무가 스스로 될 때만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떤가? 최근에 한 종교인의 은퇴식을 보았다. 인지도가 있고 제법 큰 규모의 교회를 섬기다가 은퇴나이가 되어 마지막 설교, 일종의 고별설교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신을 철저히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버리되 적당히가 아니라 ‘거침없이’ 버리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보통은 어떤가? 조금이라도 연을 맺으려고 하지 않는가? 계속해서 연결되어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은퇴를 했으니, 은자처럼 숨어살아 가려고 하니, 나를 찾지도 말고 부르지도 말고 ‘거침없이 버리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만약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 같다. 좀 적당히 할 것 같다. 너도 나도 모두 알아주기를 바란다.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를 드러나게 하려고 하는 세상이다. 이런세상에서 오롯이 자기를 숨기고 살아가는 은자들을 볼 때 고개가 숙여진다. 존경심을 가진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