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려면 (사사기 8:18~21)

  • 입력 2018.12.20 10:09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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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덕 목사(세인교회)

오늘 본문은 도망치던 미디안의 패잔병들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세바와 살문나를 심문하는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과거 7년 동안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압제할 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다볼이라는 대명사로 등장시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다볼산에서 죽인 자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18절)이 질문에 대하여 두 명의 왕들은 이렇게 답을 합니다. 이어지는 18절 하반절입니다.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① 사로잡힌 왕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기드온을 왕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해석입니다. 분명히 기드온을 왕족으로 치켜세우는 발언으로 보는 이해입니다. ② 기드온을 향해 하는 비아냥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당신이 지금 아무리 왕처럼 폼을 잡고 있지만 당신의 왕자정도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풋내기라는 비아냥으로 보는 이해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두 가지 모두는 기드온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그래서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격분한 기드온은 두 명의 왕의 목을 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경악할 만한 일을 기드온이 저지릅니다. 20절이 보고하기를 두 명의 목을 베는 것을 그의 큰 아들 여델에게 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은 아직 어린 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긍정적으로 본문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아들에게 큰 용사의 아들로서 담대함을 키우기 위한 배려라고 말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두 명에게 자존심이 상한 기드온은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의 큰아들에게 왕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칼을 칼집에서 빼지도 못하는 아들에게 사람 둘의 목을 치라는 아버지가 제 정신입니까? 아들이 어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기드온은 개인적인 복수의 칼을 뽑았습니다. 본문 21절에서 기드온이 그들의 목을 쳤다고 사사기 기자는 증언합니다. 구약학자 Younger은 이 장면의 해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느새 기드온은 피에 굶주린 늑대로 변해 있었다.”

백석대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송병현 교수는 이 부분을 자신의 주석서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기드온은 이 두 명의 왕들을 여호와를 위해 처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복수심에 불타 죽인 것이다.”필자는 이 기사의 내용을 추스르다가 19절에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개인적인 복수심으로 두 명의 왕들의 목을 치는데 동원된 단어가 바로 단 한 번도 7:24절 이후 등장하시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인위적 호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히브리어 ‘하이 예호바’를 ‘내가 여호와의 사심으로’라고 번역을 했지만 가톨릭 학자들과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번역한 ‘공동 번역’은여타 다른 한글 번역과는 전혀 다른 번역을 해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사사기8:19절의 공동 번역을 소개합니다. “기드온이 말하였다. 그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난 내 형제들이다. 너희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절대로 너희의 목숨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한글 번역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생략된 채로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번역이 아주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할 자격이 없음을 의미한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현장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불러야 합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박준서 박사의 제 3계명 해석은 탁월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3계명의 신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와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익을 구하는데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성서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p,62)사랑하는 독자들이여! 명심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사람이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부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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