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 입력 2019.04.04 15:24
  • 기자명 임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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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최재형 선생의 ‘페치카 정신’ 기리고 알린다

안중근 의사의 실제적인 후원자로 밝혀진 최재형 선생(崔在亨, 1890~1920)의 순국 100주년을 기리기 위한 추모위원회가 출범했다.

직접 목숨을 던져 투쟁한 의사나 열사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기리고 있지만 이들을 적극 지원하고 후원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4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식 및 강연회’가 개최됐다.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과 사단법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 사단법인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가 공동주최하고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 국가보훈처 등이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이종걸 노홍래 성일종 이동석 이혜훈 의원 등이 함께해 축하했다.

개회사를 전한 안민석 의원은 먼저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른다는 표현이 생각난다. 2011년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최재형이란 인물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헌신으로 오늘 이렇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행사를 갖게 된 줄 믿는다. 10년간 기념사업회를 이끌어오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이어 “한 교회 목사님이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에 앞장서는 특이한 현상을 보면서 감동을 받아 미력이나마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초라한 한 사람의 정치인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소강석 목사님께 감사드린다”며 “오늘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최재형기념사업이 더욱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최재형 독립운동가의 정신이 대한민국 후손들에게 길이 알려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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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는 기념사를 통해 “가슴이 설레서 잠이 오지 않았다. 11살에 굶주림으로 가출해 포시에트 항구에서 실신한 상태로 발견된 소년이 훗날 연해주의 부호가 되어 오직 고려인의 행복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섬겼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상기했다.

이어 “왜 우리는 그를 조금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먼저 우리 가슴 속에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우고자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최재형 포럼을 열고 추모비를 건립하려고 한다”며 “그의 정신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 조국과 고려인을 향한 감동적인 삶의 궤적들이 민족의 광야에 별빛처럼 빛나며, 이름 석자가 별빛 언덕에 영원히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의 후손이자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인 최발렌틴 회장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전투의 기억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모든 도움을 제공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최재형 선생님의 정신을 영원히 지켜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신 안민석 의원님과 소강석 목사님, 김재문 대표님 등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며 “여러 많은 후손들이 함께 기쁨을 느끼고 있다. 감사하다”고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이 자리에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과 이종걸 의원, 이혜훈 의원, 성일종 의원, 이동석 의원, 김창준 전 미연방 하원의원 등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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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혜훈 의원은 “그동안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를 하면서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 의사를 후원하고 변론에 앞장섰고, 유족들을 돌봤던 정말 가장 중요한 분인데.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걸맞는 대우를 못받았다”며 “이제는 제대로 조명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우리의 가슴에 지펴놓은 민족혼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작년 말에 소강석 목사님이 급히 연락을 해오셨다. 최재형기념사업을 위해 앞장서달라고 하셔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숙제라고 받아들였고,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안민석, 성일종 의원 등과 합심해 이 예산을 지켜냈다”며 “유관순 열사의 정신과 최재형 선생의 정신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갈수록 예산을 더 확보해서 기릴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인사했다.

문영숙 이사장의 추모사와 박주옥 교수(백석예술대)의 추모가에 이어 제2부 기념강연회에서는 「페치카 최재형」의 저자 박환 교수(수원대 사학과)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을 주제로 강의했다. 박 교수는 최재형 선생의 출생부터 순국하기까지 그의 삶의 족적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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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은 9세 때 극심한 기근과 가난으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 얀치혜로 이주했다. 한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입학했으나 11세에 굶주림으로 가출해 포시에트 항구에서 실신한 상태로 발견된다.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된 최재형은 17세까지 6년 동안 선장의 배를 타고 두 번의 세계일주를 하며 글로벌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후 유창한 러시아어로 러시아 상사에서 근무하며 당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면서 한인들의 대변자와 대부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동방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만 명의 군인들이 상주하자 최재형은 러시아 인맥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군납사업을 시작해 엄청난 부를 얻게 된다. 러시아 얀치혜 군수가 된 그는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워 한인들의 교육에 앞장서고, 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1908년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 안중근과 함께 국내 국외 최초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 1만3000루블을 쾌척했다.

최재형은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의 무기와 숙식을 제공했으며, 그의 집에서 안중근 등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했다. 최재형은 안중근과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을 모의했고, 거사를 성공시킨 후 미하일로프 러시아 변호사와 더글라스 영국인 변호사를 보내 안중근 변호에 앞장섰으나 일본이 자국변호사만 허락함에 따라 일본의 불법재판으로 안중근이 순국했다. 이후 최재형은 안중근의 가족들을 보살폈으며, 1919년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상해임시정부 내각에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지만 수락하지 않았고, 1920년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해 순국했다.

최재형의 시신과 묘지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후 유가족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다. 최재형은 사후 42년이 지난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2020년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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