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 입력 2014.10.24 10:07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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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록 목사 (논설위원)             
[프로필]
▣ 순학력 :

신뢰성 회복은 선택과목이 아니다

 

오늘의 현실은 믿음성이 바닥이 나버린 지 이미 오래다. 어디에서 신뢰성을 논의할 수 있을까. ‘신뢰성’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굳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비슷한 말로는 ‘믿음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뢰성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신뢰성을 회복하다’ ‘신뢰성을 잃다’는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불어 신뢰성에 관한 문제는 다방면으로 중요하게 쓰인다.

 

신뢰성의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으로 가치관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거나 상업적인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신뢰성의 문제가 제기될 때, 거기에는 질에 대한 것이나 가치적 기준이 논의 되면서 상당한 파장이 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빈번히 듣는 말 간운데 ‘신뢰성 회복’이라는 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가치관의 문제가 흔들리면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한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까지 믿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묘하다. 오늘날 사람들도 신뢰성을 잃고 있으며, 상품들도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의 질이 떨어지면 그 상품에 대한 구매력이 약화된다. 심하게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업은 파산의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이건 모두다 우리들이 고집해야할 신뢰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치관이 흔들리면 뿌리까지 흔들리는 위험이 뒤 따른다. 상품에서 신뢰성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 이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신뢰성의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정황에서 ‘신뢰성의 회복’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논의되어왔다. 이는 신뢰성의 회복이 관계성 회복에 있어서 필수요건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믿음성이 있는 사람, 믿음성이 가는 지도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요청되는 것이다. 하여, ‘신뢰성의 상실’은 곧 비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는 신앙인을 의미하는 통칭이다. 하지만 신자라는 말이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자란 단순히 ‘믿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믿음성이 있는 사람, 믿어도 되는 사람,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는 차상의 단계로 그 위상이 높아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용사회를 구현해야 할 주역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뢰성을 확보할 때 거기에 신용사회가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신뢰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무엇에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신묘하게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은 상호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고, 인간이 만든 기계는 신뢰성의 절대 가치를 확보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 데이터 입출력의 경우도 그러하고, 길을 안내하는 GPS라는 괴물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러기에 신뢰성의 상실은 비참한 결과를 낳기에 슬픈 일이다.

 

신뢰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신자’라는 명사형 해석이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서술적 동사형으로 자리매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독자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 신뢰성의 회복은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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