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18)

  • 입력 2019.08.22 10:27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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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수 목사
▣ 영월주님의교회 

▣ 전 터키 선교사 

 

 

무라(Μύρα, Myra)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던 중 잠시 들린 무라는 현재 터키 남쪽 지중해 해안에 있는 안탈리아 주에 속해 있는 소도시로서, 우리에게는 최초의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성 니콜라스(Saint Nicholas 270년 3월15일 ~ 343년 12월6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본래 그는 이곳에서 가까운 바다라(Patara) 태생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신앙심이 깊어지자 부친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이 후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그는 무라에 있는 교회들을 감독으로 섬기는 동안 로마의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받아 투옥되었는데, 석방된 후에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한 비잔틴 제국의 니케아(Nicaea)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고 전한다. 남을 돕기 좋아하는 성 니콜라스는 사후에 그의 아름다운 선행이 조심스럽게 알려졌는데, 그가 행한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 하나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는 어느 가난한 세 처녀에 관한 것으로 이곳에 사는 어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부친이 너무 가난하여 딸들을 시집보낼 수 없게 되자 사창가로 팔아버릴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우연히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우스 감독은 그 가난한 딸들을 돕고자 했으나 남에게 알려질까 염려하던 차에 한 밤중에 남 몰래 창문으로 딸들이 출가하기에 넉넉할 만큼 황금이 들어있는 자루 세 개를 던져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겸손한 성격의 그는 선한 일을 대놓고 낮에는 못하고 밤중에 남 몰래 자루 세 개를 던져 놓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도움으로 세 딸은 천신만고 끝에 사창가로 팔려갈 위기를 모면하고 정당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오른 손이한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니콜라스의 모습 속에서 비밀리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사랑을 실천한 그의 겸양의 덕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주는 관습으로 발전하였다. 성탄절이 있는 십이월 초에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길거리에 유독 어린이들이 모여 ‘성 니콜라우스 노래’라는 짧은 시를 노래하며 집집으로 다니는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집주인들은 문을 열고 이 귀여운 어린이들에게 과일과 사탕 혹은 돈을 줌으로써 반응을 나타낸다.

마치 유년 시절에 손을 호호 불면서 흰 눈이 내리던 겨울에 골목을 누비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새벽 송을 돌았을 때를 연상케 한다. 유럽에서는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을 기념하면서부터 그가 남긴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까지 계속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본래 이름인 니콜라스는 네덜란드어로는 산테 클라스라 부른다. 그런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외경 가운데 하나인 테즐라서에 의하면 이곳 무라에는 2세기에 이미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잠시 방문한 무라에 복음이 전해지자 서서히 교회가 세워지고 이곳에 복음이 융성해 지자 위기를 느낀 도미티안 황제는 96년경에 무라에서 교회를 섬기던 성 니칸데르(St. Nicander) 감독을 순교의 제물로 삼았다고 17세기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미카엘르퀴엔(Michel Le Quien)이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과거 이곳 무라에 거주하던 그 많던 그리스 출신의 신자들은 1920년까지 이곳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나, 1923년 그리스와 터어키 간에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이제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자리에는 터키인들이 들어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과거 이곳에 거주하던 자들이 사라진 빈 집과 교회가 덩그라니 남아있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허전한 마음을 갖게 하고 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무라에서 배를 갈아타기 위해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사도 바울이 갈아 탄 배는 곡물을 운반하던 화물선으로 로마까지 복음전도를 위해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을 호송하던 백부장은 이곳에 들려 배를 갈아타기로 하였던 것이다.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행 27:4~5)우리 일행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이 잠시 들렀던 바다라를 지나 그림같이 아름다운 지중해해안을 따라 마침내 안주라쿠스 강변에 위치한 무라에 도착하였다.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들이 곳곳에 조각처럼 누 앞에 자리하고 바다 방향을 향해 세워진 원형극장을 보니 매우 인상적인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숨을 돌려 성 니콜라스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였다. 이 교회는 6세기에 세워진교회로, 지금 이 건물은 늘어나는 신자들을 위해 확장된 것으로 11세기 후반에는 희랍 정교회의 수도원이교회 건물에 더해졌다고 전한다. 호기심을 갖고 교회 안을 들어가 보니, 바닥이 다양한 색채를 띤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과연 이 교회가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교회임을 직감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아직도 벽면 곳곳에 성경에 언급된 이야기가 담긴 성화가 남아있어 이곳에서 예배하던 신자들의 간절한 찬양과기도의 향기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마저 감돈다. 성 니콜라스 교회를 빠져 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그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하고 먼저 나를 위해 살아온 모습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섬김의 모습은 그곳을 떠난 후에도 우리 마음 속에 오랫동안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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