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되찾아야 할 때

  • 입력 2019.12.19 17:28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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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세상 죄를 사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이 반드시 주(主)로 영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한 구절의 성경 말씀에 담겨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고 영접하지도 아니 하였다. 즉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요1:11) 한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날이 2천 번이 넘게 지나가도록 여전히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함”(요1:10)의 오류가 반복되는 불행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그 오류의 깊이나 넓이가 더한 것 같다. 우리가 흔하게 나누는 인사와도 같은 ‘세상이 크냐, 하나님이 크냐?’는 물음에 세상에 무게를 둔다는 목소리가 예년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일말의 책임이라도 져야 할 것 같은 무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어찌하다가 크리스마스마저 실종 되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노릇이지만 이제는 교회마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이다. 표현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안타까움이 맴돈다.

한편으로는 성탄절 분위기가 차분하면 좋지 않으냐는 반대의 논리도 있겠으나 그것은 좀 아니다 싶은 것이, 지금의 이런 분위기는 곧 우리 주님이 오신 날을 사람들이 점점 더 잊어가는 것 아니냐 하는 이유 때문이다. 앞서 질문과 답변을 개진했던 것처럼 세상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인다고 하는 것이 저변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짐작이간다. 자기 땅에 오신 주님을 붙잡기 보다는 세상이 주는 물질이나 권력 등을 붙잡는 것이 세상 현실에서의 더 큰 유익이나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사실 그 원인이야 이러니 저러니 판단하기 어려우나, 우리가 함께 살아온 지난 2019년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양상의 대결 국면이 우리를 짓눌러 평범하고 순박한 범인(凡人)들로서는 결코 편안한 날이 없었던 한해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새롭고도 해괴한 거친 말(言)들 또한 많이도 고개를 내밀었다. 백성을 위한 정치가 실종되면서 ‘정치 폭망’이라는 말이 회자되는가싶더니 나라의 경제가 표류한다 하여‘경제 폭망’이라는 등 신조어의 등장이 끝이 없을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리스마스 폭망’이니 ‘교회 폭망’이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아 한편 안도하기는 하나 마음 놓을 수만은 없을 듯하다. 다들 알만한 말이지만 ‘폭망(爆亡)’이라는 말은 ‘폭삭 망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현실적 사실여부를 떠나 결코 바람직한 신조어는 될 수 없을 것 같을 뿐 아니라 속히 퇴출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번 세상에 뿌리를 내린 신조어는 세월이 이를 덮어주기 전에는 여간 뿌리가 뽑히지 않는 끝질김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때를 당하여 우리가 당장 마음에 품고 나서야 할 일은 크리스마스를 되찾는 일이 아닌가 한다. 크리스마스가 만백성의 입에서 찬양되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먼저 우리죄를 속(贖)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인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바로 세우고 바로 기념하는 것은 물론,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바로 알리고 가르치는 일에 솔선하는 것,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있어 보인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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