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부(3)

  • 입력 2020.06.11 10:58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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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모든 것이 허무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깨어나 하늘을 쳐다보며 한 말이다. 역사상 전쟁과 평화는 늘 공존하였다. 전쟁 없는 평화도, 평화 없는 전쟁도 없었다. 1세기 팍스 로마나 나 21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는 다 허구이다. 무력으로 주도권을 잡고 금력으로 지배권을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조부는 죽기 전에 손자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바, 아버지는 연상의 어머니와 일찍 결혼하여 자녀도 빨리 낳았다. 그래서 나는 인정미 넘치는 조부모를 만날수 있었다. 1962년 5월 25일,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른 아침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3남매가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살며 시 방문을 열었다. 갑작스런 조모의 출현에 모두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하였다. “얘들아, 사람이 죽었는데 밥만 먹고 있느냐?” 그 상황이 눈에 선하다. 조모는 조부의 죽음이 의외가 아니란 듯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기역자로 꼬부라진 허리를 한껏 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쪼글쪼글한 입술로 또박또박 말하였다. 하지만 간간이 입술이 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즉각 숟가락을 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마당에 나가보니 조부의 옷이 지붕 위에 던져져 있었다. 초상집이라는 표시였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밥상을 들고 상방에 갔다. “할배요, 식사하이소!” 그즈음 전방에 있던 할머니는 뭔가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먼저 상방에 들어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할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 노년에 따로 살기는 하였으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슨 교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나는 벚나무 아래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한껏 으스대며 말하였다. “우리 할배 죽었다! 우리 집에서 떡 하면 많이 줄게.” “정말?” “그래!” “약속!” 그렇게 아이들과 일일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뭔가 이상히 여기면서도 사람이 죽는 것이 그리 큰일인지 몰랐다. 아이들에게 떡을 줄 수 있다는 호의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남에게 주는 것을유달리 좋아하였다. 누구에게 무엇을 갖 다 주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갔지만, 무엇을 얻어 오라거나 빌려오라고 하면 왠지 가기가 싫어 어물쩍거렸다.

당시 떡을 먹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바, 나는 무슨 큰 호의라도 베푸는 양 거들먹거렸고, 아이들은 함지박같이 입을 크게 벌려 기뻐하였다. 장삿날 나는 대나무 기를 들고 장례행렬보다 몇 발짝 앞서 산으로 올라갔다. 기는 붉고 긴 천에 애도의 글을 적은 만장과 단 순히 삼베조각을 매단 것이 있었다. 그중에 작고 가벼운 삼베 기를 내가 들었 고, 크고 무거운 만장 기를 고종사촌 형이 들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상방에 상막이 차려지고 삼년상이 시작되었다. 부모는 3년간 상식을 올리고 애곡하였다. 초하루나 보름에는 상제를 지내고 더욱 예를 갖춰 크게 울었다. 상방에 들어가면 으레 상복을 입었으며,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슬퍼하였다. 나는 상방이 너무 무서웠다. 방안은 항상 어둡고 침침하였으며, 벽에 걸린 삼베옷과 구석에 세워진 대나무 지팡이, 짚으로 둥글게 말아놓은 복나까리, 이상야릇한 향냄새, 시커먼 상 위에 세워진 위폐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머리털이 삐쭉거렸다. 상 뒤로 쳐 놓은 병풍 속에서 무엇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유수불부회(流水不復回)요 행운난재심(行雲難再尋)이라. 흐르는 물은 돌아올리 없고 떠도는 구름은 찾아볼 수 없네! 인생의 시작과 끝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주어진 은혜가 아닌가?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 서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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