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할 수 있는 것(요한복음 1:1)

  • 입력 2020.06.18 10:19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원석 목사.jpg

최원석 목사(서울중앙교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은 왜 굳이 ‘태초’라고 하는 모든 처음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는 난해한 표현으로 자신의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말씀’ 대신 ‘그리스도’나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루어진 역사이고, ‘인자’는 육신이 되셨을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면 간단할 것을 굳이 ‘말씀이 계셨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도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유대인’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구분하는 어떤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초’라는 시점으로 거슬러 가야 하는 이유는 진짜 본질, 유일한 기준, 모든 것의 근원을 찾아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진정한 원천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쉽게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거기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유일한 권위, 그것이 말씀이라면,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고 또 그런 것들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무슨 뜻입니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서로 구분된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것은 차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의 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당신의 뜻을, 당신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이 세상에 나타나는 통로는 말씀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감지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 시라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말씀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전부가 말씀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과 ‘말씀’은 어떤 관계입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본질은 ‘말씀으로 낳으시고 성령으로 인 치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모든 것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빛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 리스도인, 성도는 그런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신 것을 믿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