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외조부

  • 입력 2020.09.28 09:2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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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거꾸로 가는 교회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장애인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를 걱정하면서 원장이 한 말이다. 그는 입이 돌아가고 눈이 감기지 않는 구안와사 시각장 애인이다. 10명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산간벽지 교회를 32년째 자비량으로 섬기며, 30명의 중증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콩나물을 팔러 다녔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외조부는 딸만 여섯을 낳아 2번에 걸쳐 양자를 두었으나 모두 떠나고 말았다.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조부모는 죽어서도 남의 땅에 묻혔다. 외조부의 남동생이 하나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작은 외조모가 두 딸과 외아들을 키웠다. 딸들은 장성하여 출가하였으나 아들은 약관에 병사하여 외갓집은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나보다 10살가량 많았다. 작은 외조모는 우리 집 아래채에 살다가 마을 끝 바람 평지의 빈 오두막으로 이사하였다. 움막 같은 단칸집이었다. 거기서 아들이 죽었다. 점을 치고 굿을 하는 등 양법까지 동원하였으나 무위 허사였다.

그가 죽기 전에 언뜻 보니 소변을 제대로 못 보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외가에 가서 부고하였다. 외조모가 크게 슬퍼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였다. “결국은 죽었어.” 그때 우리 마을에서 굳은일을 도맡아 하는 지적장애인이 그를 멍석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공동묘지에 가서 묻었다. 독자 잃은 과부가 무덤까지 찾아갈까 싶어 아무도 모르게 대충 땅을 파고 평토장하였다. 작은 외조모는 밤낮없이 공동묘지 주변을 배회하며 애곡하였다. 결국 둘째 딸이 와서 부산으로 모시고 갔다. 외조모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외조부를 둘째 이모가 모시고 갔다. 노 환이 점점 깊어지자 첫째 이모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어머니의 권유로 이종형과 병문안을 갔다. 외조부는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귀가 먹어 듣지 못했다. 이모가 귀에다 대고 크게 말해야 겨우 알아들었다. 외조부는 누가 찾아오면 꼭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누고?” “훈이시더!” “누구라고?” “창바우 훈이요!” “누구?” 보다 못해 내가 외조부의 귀에다 대고 크게 소리쳤다. “훈이요!” “뭐? 훈이라고! 아이고, 아이고! 내가 이제 너를 보고 다시는 못 볼 것이다. 아이고!…” 외조부가 얼마나 슬피 우시든지 나도 울고 이종형도 울고 이모도 울었다. 외조부는 30명이 넘는 외손자녀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 딸 여섯과 사위 여섯이 다 모여 장례를 잘 치렀다고 들었다. 나는 외조모 때와 마찬가지로 외조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직장생활에 부담을 준다고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조부가 슬피 울면서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우연히 만난 당신은 나의 인연입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중국 티베트 민요의 가사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살고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돈을 따라 살면 도둑이 되고 주님을 따라 살면 제자가 된다. 주님의 제자는 가까운 지름길이 아니라 가장 먼 우회로를 걷는다. 어둠은 흑 암의 권세로 물리칠 수 없지만 반딧불은 폭풍우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구속받는 빈곤이나 자유 없는 부귀는 다 생지옥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다. ‘소금은 좋은 것이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누가복음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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