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버지(2)

  • 입력 2020.10.29 11:00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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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완전히 0000 이해하진 못해도 온전히 사랑할 순 있습니다!”

실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맥클레인 목사가 느닷없이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며 한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밤중을 한낮으로 여기며 흑암의 공포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며 살아간다. 우리는 비록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도 그 운명적 만남을 위해 늘 준비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기를 배우는 것이다. 지금도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게 한 사탕발림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아니야,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1962년 조부가 돌아가시자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아버지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우리 외갓집에 무슨 은전이라도 베푼 양 으스대며 속였던바, 아버지는 그에게 땅을 사기당하고 말았다. 이의를 제기하자 시도 때도 없이 돌멩이를 들고 찾아와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결국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졸부가 되어 서울로 이사하였고 우리는 졸지에 궁핍하게 되어 어머니가 행상을 시작하였다. 옷가지를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팔다가 나중에 생선장수도 하였다.

보리나 콩, 팥, 깨, 계란 등을 교환하여 저녁 늦게 돌아왔다. 당시 어머니와 같은 보따리장수가 많았다. 넷째 이모부땅을 빌려 농사도 지었으나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읍내 교육청에 다니다가 산길로 12㎞쯤 떨어진 산간오지 분교로 옮겨 주말에만 집에 왔다. 1970년 나의 차 사고로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지붕개량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가지붕을 헐고 시멘트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큰이모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하였다. 이후 감자나 고구마, 배추, 무 등의 농산물을 밭떼기로 사서 대구 도매시장에 넘기는 일도 하였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막일을 하면서도 1980년대까지 묵묵히 고향을 지켰다. 하지만 1981년 제대를 1개월 앞둔 동생의 무기고 초병 사건, 1982년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된 매제의 공사장 추락 사고가 잇달아 일어나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살았어!”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 무료하게 지내다가 도로 공사로 우리집 마당이 수용되자 아예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하였다.

13세기 초 고려시대 울진으로 내려가, 17세기 조선시대 영덕을 거쳐 19세기 구한말영양으로 이주하여, 20세기 말까지 800년간 살아온 고향을 그렇게 떠남으로써 조상들의 선영만 그곳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10년쯤 아파트 경비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내가 할 일이 없는 서울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얼마간 어머니와 함께 일가친척을 두루 방문한 후 4촌 여동생이 살고 있는 청송으로 낙향하였다. 그 고모는 아버지 항렬의 유일한 혈족이었다. 2003년 추석으로 기억된다. 조부 산소를 찾아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막내가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이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는지 의아하였다. “여기 있는 이 땅이 전부 우리 거였어요?”“그랬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브로커에게 속아서…”그리고 만감이 교차한 듯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진정한 용서는 5번이 필요하다. 먼저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래야 남도 자기를 용서하고 나를 용서할 수 있다. 그때 십자가에 의한 완전한 대속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실로 용서는 우리의 범죄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면역항체요, 불평불만과 원망의 독성을 제거하고 복수의 악순환을 퇴치하는 전천후 백신이다. ‘너희가 남을 용서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복음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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