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카르페디엠

  • 입력 2021.04.09 09:12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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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호라티우스의 시 <오데스(Odes)>에 나오는 구절로 ‘현재를 즐겨라’는 라틴어다. 생태여성신학자로서 이은교회 목사인 구미정 교수가 성서학당 강의를 마치며 덧붙였다. “일과 쉼과 놀이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놀이니라.” 일을 놀이로 삼아 즐겁게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는 천복을 받았다. 물질의 축적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 무엇을 하든지 불행하다. 그는 천벌을 받았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그래서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게 아니라 풍성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였고, <어린왕자>의 생텍쥐페리도 단순하게 사는 게 가장 좋으며, 진정한 재산은 나눠주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나누고 비우며 섬기는 일을 맡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알뜰히 살려고 노력하였다. 학기가 바뀌고 새 책을 받으면 으레 지난 달력을 뜯어 책가위를 씌웠다. 동생에게 깨끗이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어느 때는 나도 헌책을 받았으나 그것도 표지를 싸서 사용하였다. 동생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로 책은 물론 옷도 물려받았다. 가끔 미안하기도 하였으나 항상 웃으며 받았고 아무 불만이 없었다.

또 나는 무상급식자로 선정되어 우방이 원조한 식량을 배급받았다. 거의 모든 애들이 어렵게 살았으나 물량이 부족하여 좀 더 어려운 아이들만 혜택을 입었다. “너희들 가운데 정말 먹고 살기 어려운 아이가 있으면 말해라.” 선생님이 물었을 때 한 아이가 나를 추천하였다. 우리 집은 실제로 생활이 어려웠다. 농촌에 살면서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 아이는 부잣집 아들로 새로 지은 큰 집에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이 어머니는 내 어머니의 꿈속에서 인삼을 빼앗았고, 그 아버지는 중개인을 앞세워 내 아버지의 토지를 가로챈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옥수수가루를 한 바가지씩 주다가 나중에 강냉이죽을 끓여 한 사발씩 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줄을 길게 서 받아먹었다. 어떤 아이는 재빨리 먹고 또 줄을 섰다가 꿀밤만 맞고 쫓겨났다. 그러나 환하게 웃으며 활기차게 놀았다. 다들 배고픈 시절이라 애교로 봐주었다. 이후 딱딱하게 굳은 가루우유를 조금씩 나눠주다가 마지막으로 바싹 마른 빵을 하나씩 주었다. 나는 그것도 집에 가져갔다. 언젠가 아이들이 야밤을 틈타 교실 창문으로 들어가 그 빵을 훔쳐 먹었다. 다음날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으나 선생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보따리장수를 시작하였다.

옷가지, 생필품, 생선장수 등 닥치는 대로 하였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웃 아주머니와 함께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새벽에 물건을 잔뜩 이고 나가 저녁에 이것저것 많이 바꿔 돌아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동료가 허리통증으로 병석에 들자 어머니도 장사를 그만두었다. 그 부인은 한창나이에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이후 넷째 이모네 땅 다섯 마지기를 빌려 농사지었다. 추수한 수확물을 반으로 나누었다. 이모부는 산중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여러모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곡식을 나눌 때도 항상 관대하였다. 언젠가 어머니를 따라 그 밭에 일하러 갔다. 어머니가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김을 맸다. 일을 돕고 싶었으나 아무리 봐도 조와 잡초를 구분할 수 없었다. 길가에 앉아 막대기로 풀을 툭툭 치며 놀았다. 그때 옆 논에서 피를 뽑던 동네 할아버지가 해골을 주워 들고 강에다 휙 던지며 말했다. “좋은 곳으로 가이소!” 어머니가 묻자 전쟁 때 죽은 사람의 유골이 장마에 떠내려 왔다고 하였다. ‘내가 궁핍해서가 아니라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빌립보서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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