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훈 칼럼] 33. 필라델피아

  • 입력 2021.10.28 17:45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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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필라델피아(Φιλάδελφιά)는 헬라어로 ‘형제 사랑’을 말한다. 베드로가 유일하게 사용한 단어로서 혈육의 우애는 물론, 믿음의 형제와 자매간의 우정도 매우 소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 장애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헬렌 켈러(미국, 1880~1968)의 말이다. 뇌척수염으로 태어나 9개월 만에 청각과 시각, 언어를 상실하여 삼중고 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49년 동안 함께한 설리번 선생과의 사랑 나눔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불평불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높은 성공이 아니라 낮은 섬김이, 많은 소유가 아니라 작은 나눔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욕심의 반대는 자족이다.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욕심을 버릴 수 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변화뿐이다.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신다. 실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갸륵히 여기셨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학습지를 끊고 문제지를 받자. 이제는 이론이 아니라 이행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예수와 함께함으로 천국이 따라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이다.” C. S. 루이스(영국, 1898~1963)의 말이다. 나무는 스스로 적당히 열매를 맺지만 사람의 욕심은 죽어도 버리지 못한다. 대가를 찾아 일하면 수입도 떨어지고 고생만 하지만 가치를 위해 일하면 수입도 늘어나고 기쁨이 넘친다. 그래서 네게브 사막에서 대대손손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베두인이 말하였다. “여기는 사나운 모래 폭풍과 작열하는 태양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합니다.” 영양의 첩첩산중 암자에서 30년간 참선하며 수행하는 육잠 스님이 케케묵은 장작더미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건 내 장례를 위한 다비목입니다. 나를 위해 남이 쓸 것입니다.” 그는 지게를 자기 분신이라 하였다. 욕심은 부리지 말고 버려야 한다. 부리면 부릴수록 불행하고 버리면 버릴수록 행복하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위대한 사람을 찾아 위대하게 쓰시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들어 평범하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진정한 차인은 차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 차를 대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맞다. “오, 주여! 이들에게 어찌 아가페(하나님 사랑)를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들이 필리아(친구 사랑)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들이 저들보다 순수하고 깨끗함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들은 약삭빠르지도 않고 잔꾀를 부리지도 않습니다.” 재활작업장의 형제들이 로봇처럼 일했다. 주단기보호시설의 친구들이 장난감처럼 놀았다. 공동생활가정의 천사들이 아바타처럼 먹었다.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답답하여 호소하였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마태복음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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