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마주봄이다

  • 입력 2014.05.08 16:35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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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목사 (아름다운교회)             
[프로필]▣ 순복음 신학교 교수▣ 일산기독교연합회 회장▣ 사랑이 있는 마을 담임▣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조선 후기 선조 때 어의를 지낸 허준 선생은 ‘불통즉통(不通卽痛)’ 즉, 소통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병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이혼,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 단절, 직장 내 갈등, 사회와 국가의 문제 뒤에는 소통의 부재와 왜곡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이슈는 소통입니다. 소통은 독재와 전제를 예방하는 길이며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실현하는 첩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지도자들의 불통을 지적하며 소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소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아내의 호칭 중 마누라, 여편네는 얕잡아 부르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누라는 ‘마주보고 눕는 사이’라는 뜻이고, 여편네는 ‘옆에 있네’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부는 서로 마주보는 관계입니다.

부부가 사이가 좋을 때는 마주보고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며 껴안고 자지만 말다툼을 하면 잠자리에서 등을 돌립니다. 부부는 절대로 등을 돌리고 살면 안 됩니다. 마주보고 누우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서로 등만 돌려버리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만 만날 수 있는 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가장 기본적으로 마주봄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 격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고 대화합니다. 하지만 신분이나 위치 등 격에서 차이가 나면 마주 보지를 못합니다. 결국 소통은 서로가 평등한 관계일 때, 같은 높이에 있을 때, 눈높이가 맞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인은 땅바닥에 내쳐져 있었고 사람들은 여인을 쳐 죽이려고 손에 돌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토론과 대화가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저희들과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시자 모두 가버렸습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는 대화가 어렵습니다. 마주봄 없이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자기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여와 야도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입장을 공감한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마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마주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눈높이를 맞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통하려면 성육신의 원리를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올라가는 것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므로 소통하려면 먼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영국 캐태릭 캠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그림이 있습니다. 노르망디 해변 위에서 전사한 한 통신병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병사는 폭격으로 절단된 전선을 연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신이 케이블 양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전도체가 되어 죽어 갔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소통(Through)’입니다. 한 병사의 죽음이 끊어진 선을 연결시켜 통신을 가능케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은 한 손에 아버지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나의 손을 쥐고 계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친히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소통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소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침묵하셨습니다. 경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실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자존감을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가깝다는 이유로 ‘이해하겠지?’라고 생각하며 함부로 말하고 대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울수록 더욱 예절을 지키고, 상대의 자존감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항상 시끌시끌한 것은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온 세계가 소통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자기 뜻만 고집하고 자기주장만 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의 길이 있습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우리와 마주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 소통의 달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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