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교과서(8-1)

  • 입력 2015.04.23 10:32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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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기 목사
[프로필]◈ 한동교회

제 2 부 둘째 기둥은 -Ⅰ

 

예수 2차 오심-일곱 나팔 불기다 -Ⅰ

 

둘째 기둥은 일곱 천사가 각각 한 번씩 일곱 번 나팔 불기 내용이다. 정통 신학 해석들은 일곱 천사 나팔 불기도 일곱 인 떼기처럼 하나님의 일곱 색깔 재앙 혹은 진노라고 한다. 일곱 인 떼기도 재앙, 일곱 나팔 불기도 재앙이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해석 논쟁은 일곱 나팔은 일곱 인떼기와 어떤 관계일까 하는 것이다. 세계의 해석학의 논쟁은 단순히 ‘이 두 재앙들이 동일 사건의 반복적 재현(recapitulation)인지 아니면 그 무서운 재앙들 사이에 순차적 진행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학자들의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이렇게 세계 해석학계는 하나님의 재앙들로 떠들썩하다.

 

6장은 일곱 인 떼기 재앙.

8~9장은 일곱 나팔 재앙.

12~13장은 악한 영들과의 전쟁 3년 반(마흔 두 달) 환난.

14장은 곡식과 포도송이 추수 심판.

15~16장은 일곱 대접 재앙.

17장은 음녀 심판

18장은 바벨론 심판.

19장은 세계 3차 대전의 불 심판.

20장은 사탄의 심판과 멸망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세계 전통적해석자들의 프리즘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살펴본다면 전체 22장에서 재앙과 심판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렇게 그들의 눈으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3분의 2가 진노와 재앙과 심판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불. 화염. 폭발. 천재지변. 전쟁. 파멸. 지구 폭발로 만든다. 그 영화가 세상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한다. 하나님이 기록하신 그 두루마리의 요한계시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 나온 대다수의 요한계시록의 해석들은 하나님의 목적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주실 때는 어떤 시대였는가? 그 때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자 모두 입을 모아 하는 말은 교회가 환난이 심히 많던 시대였다. 또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기다리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신앙의 과도기였다.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가 힘들었고 복음을 증거 하기란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전해야 하는 시대였다.

 

만약 독자가 이런 유사한 시대에 사랑하는 약혼녀를 이방인의 땅에 두고 고향에 홀로 와서 곧 가겠다고 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수년간 떨어져있는 남자로서 그 약혼녀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편지를 할 것 같은가? 신부는 자기의 순결을 지키려고 유혹과 시험과 핍박을 견디고 있는데 서신의 60%이상이 약혼자가 화가 나서 내가 가면 다 진멸해 버릴 거야, 너도 정신 차려 똑바로 살기 바란다는 내용뿐이고 소망과 위로가 없는 편지라면 다시 읽을 마음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이런 해석자들의 요한계시록을 누가 읽을 마음을 가질것이며 누가 요한계시록을 강단에서 설교를 하겠는가? 하나님은 정말로 그런 내용으로 계시하셨을까?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마음껏 설교하지 못하는 목회자인 필자가 마음이 더 괴로운 이유는 ‘이 모든 재앙의 계획 예비함과 실행하시는 이가 우리 하나님이시라’라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재앙들을 쏟아 붓는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원한이 쌓여서 재앙만을 일삼는 신이 되셨는가?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란 말이다.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자기의 말씀만을 따르며, 섬기며, 예배하는 자녀들까지도 이런 재앙과 심판과 진노를 내리신다고 해석하니 어느 누가 그런 신(神)을 섬기려 하겠는가? 어느 누가 그런 신(神)에게 감사하고 찬양하겠는가? 이렇게 코너에 몰린 해석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성도들은 공중 휴거하여 재앙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피해 가려고 하지만 그런 면피성 해석 자체가 더 궁지에 몰리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말 이런 해석들은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의 이미지와 명예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 자신 신학자의 양심에 묻고 싶다.‘우리가 섬기는 우리 아버지 되신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환난과 재앙과 심판과 진노를 내리실까’‘그렇지 않다면 다른 것들이 그렇게 환난을, 재앙을, 진노를 내리고 그 악함을 하나님께 뒤집어씌우는 것일까’정말 그런 하나님이신가? “아니다.”라는 외침이 내 신앙양심이 내린 결론이다. 도리어 요한계시록을 읽고 생각하고 주석을 하면 할수록

 

* 나는 감사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런 무서운 신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나는 찬양했습니다.

단연코 나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나는 외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고 「하나님의 명예 회복」 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을 들고 일어섰다. 필자는 일곱 봉인 제거할 때와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 불 때에 일어난 재난과 환난은 우리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가 아니라고 지면을 통해 선언한다. 그러면 우리는 일곱 천사 나팔 불기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면 누가 왜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부터 해결하여야 한다.(하나님의 명예회복 선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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