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로 작정하면 뭐가 두려울까

  • 입력 2014.07.07 11:19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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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록 목사 (논설위원)             
[프로필]
▣ 순학력 :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중대사(重大事)에 직면하여 거기에 대해 결판을 내고자 할 때 비장한 각오로 내 뱉는 소리이다. 사생결단이라고 해서 죽기로 작정하고 결단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한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듣는 ‘죽기로 작정하면 무얼 못하겠냐’라는 말이 있다. 이 소리의 뉘앙스는 죽음이 최후 수단이 아니라, 불합리하게 겪어야 하는 아픔이나 실패의 늪에서 혼신을 다하여 뛰어 넘고, 풀어 나가려는 결단의 의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왜 그리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죽음이 문제 해결의 그 어떤 방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삶의 대한 가치관의 몰락이 불러오는 게 자살이라고 하지만, 현대인들은 너무 싶게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 그건 삶의 가치기준이 너무 빈약하거나 재기(再起)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왈가왈부 할 처지는 아닌 성 싶다. 문제는 풀지 못하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는 법이다. 문제가,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의지의 결단보다는 더 크게 문제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그런데 풀어야 할 매듭을 적당히 헝클어진 체로 밀쳐두려고 하는 게 현대들의 취약점이라고 하든가. 온실에서만 성장한 화초는 혹한(酷寒)을 견디지 못하는 법과 일맥상통한다고나 할까.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게 인생의 삶이 아니가. 순리대로 척척 이거나 거침없이 풀려 나가는 게 인생이 아니라면 말이다. 부닥쳐도 보고, 때로는 물러서기도 하고, 또 다시 도전해 보는 투혼을 업그레이드 하려는 의지(意志)를 불태워보자.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해결 되는 건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설령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 해결 후에 사랑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그들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한다는 말인가. 설사 자살로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 살면서 문제는 해결해야 하고, 엉클어진 실타래 풀 듯 인고(忍苦)로 세월 넘기며 살다보면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자살은 약자가 선택하는 안일한 자기 도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소리인지 모르겠다. 쉽지 않겠지만 절망을 절망으로 보지 말고, 당당히 대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죽기로 작정하면 뭐가 두려울까.’ 절망의 길에선 그리 쉽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재기(再起)의 길을 찾아내겠다는 열정과 의연(毅然)함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생명은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쉽게 던져 버려도 되는 게 아닌,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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