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의 기독교 역사를 지켜나가는 제물포문화아카이브

  • 입력 2017.03.22 08:17
  • 기자명 임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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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여년 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곳. 1902년 미국을 향한 한인 이주가 처음 시작된 곳. 인천 제물포의 역사적인 의미는 한국 기독교에 있어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제물포의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제물포문화아카이브(이하 아카이브)다. 이사장 고창곤 목사(인천영락교회)는 제물포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물과 유물 등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왔다.

제물포는 본래 고구려의 미추홀현(彌趨忽縣, 또는 彌鄒忽縣)이었는데, 백제가 점령한 뒤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됐다.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까지 100여 년간 중국의 동진·송·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였고, 고려시대에는 서·남해안 지역과 개성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연결되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이었으며, 영종도(永宗島)를 연결하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이곳은 삼남(三南)의 조선(漕船)이 한강에 진입하기 전의 정박지였으므로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 특히 1876년(고종 13)의 강화도조약과 1882년의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뒤 개항장으로서 급속히 변모해 나간 곳이기도 하다.

아카이브와 고 목사가 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그 역사성과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다. 지역 문화 속에 한국교회의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고 목사는 문화 속에 들어 있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조명하고 보존하기 위해 인천 지역 목회자와 장로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 목사는 “인천 하면 한국교회 최초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라며 “문화를 통해 뿌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고증해 알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이어 “지난해에는 인천 출신들 중에서 이 땅을 계몽시킨 인물들의 기록과 유물 등을 찾아 새롭게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방대한 자료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제물포와 인천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고 목사는 국내 기독교 역사와 유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문화예술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문광부 산하 7개 부서에 기독교 역사를 담당하는 위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관련 부처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12명 중 1명의 기독교 역사 관련 위원을 둘 수 있도록 성사했을 정도다.

또 중앙박물관에 기독교 관련 역사 유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시 관장을 찾아가 기독교 유물관을 만들어줄 것을 건의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고 목사는 인천과 제물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 보이며 지역에 새겨진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존하고 계속해서 발굴해 알려나감으로써 소임을 다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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