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궁 찬양사역자, 대중음악-CCM 오가며 활약

  • 입력 2017.04.18 11:40
  • 기자명 강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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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김동궁 찬양사역자
 

2015년 개최된 제23회 극동방송 전국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주의 은혜’라는 곡으로 동상과 작곡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주목받은 김동궁 찬양사역자가 대중음악과 CCM 장르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다.

극동방송 ‘전국복음성가 경연대회’, CBS ‘크리스천뮤직페스티벌’, C채널 ‘가스펠스타C’ 등 교계 방송사들이 주최하는 찬양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신예 찬양사역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찬양사역자로의 등용문이 되고 있는 것.

특히 23회를 거듭하며 그 명성을 인정받은 극동방송 전국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동상과 작곡상을 차지하며 검증된 신예 김동궁 사역자의 특별한 행보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김동궁 사역자는 지난 2월 대중음악 남성듀오 ‘데이스타’로 데뷔하여 멤버 준우와 함께 ‘한울’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데뷔곡 ‘흘러’는 잔잔한 감성발라드로, 트렌디한 노래만이 살아남는 요즈음 가요시장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따끈따끈한 신곡 ‘보고싶어서’도 발매돼 인기를 끌고 있다.

근래 대중가요계에서도 데이스타와 같은 감성발라드를 지향하는 남성듀오의 등장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빠른 박자에 시끄러운 기계음, 의미 없이 반복되는 가사를 내뱉은 아이돌 가수의 음악이 주를 이루는 추세를 역행한 데이스타에 이목이 주목된 것이 사실이다.

데이스타는 매월 한 곡씩 6개의 싱글앨범을 선보일 예정이며, 이 곡들을 모으고 신곡을 더해 정규 혹은 미니앨범까지 발표할 전망이다.

“원래 목표가 찬양사역과 대중가수 활동을 겸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중음악을 해서 인지도를 쌓고 나서 찬양사역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좋은 이미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몇몇 분들은 ‘세상음악에 물든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모든 음악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에 구분 짓고 선을 긋지 않으려 합니다.”

찬양사역자로서의 한 우물을 파는 것보다 대중가수 활동으로 폭넓은 인지도를 먼저 쌓으려 한 것. 찬양사역자를 꿈꾸는 20대 청년의 고민과 기도가 담긴 행보였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모처에서 만난 그의 첫 인상은 ‘순수함’이었다. 큰 키, 준수한 외모에 세상 물정 모르고 고생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삶의 여정들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교회 안에서 나름대로의 고충을 겪으며 성장한 김동궁 사역자. 그는 고등학생 시절 누나와 함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원치 않았던 부상으로 투병을 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 광야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교우관계도 원활하고 운동도 좋아했던 그. 친구들과 함께 미식축구를 하던 어느 날, 허리를 심하게 다쳐 2개월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앉지도 못하고, 그저 홀로 천장만 바라봐야 했던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해 봤다고 한다.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던 친구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난 다쳐서 이러고 있고… 부모님도 떨어져 계신데, 진통이 심해서 움직이지 못하니 비행기도 탈 수 없고, 비싼 치료비 때문에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무작정 하나님을 원망하던 제게 들려온 건 찬양이었습니다.”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으로’(주께 가오니 中)

김동궁 사역자를 고독과 고통의 광야에서 건져낸 찬양은 ‘주께 가오니’였다. 독수리 날개 치듯 올라가기 원한다는 찬양의 가사에서 그는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었고, 그때부터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찬양사역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이후 귀국한 그는 백석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진학해 대학원까지 수료했다. 극동방송에서 수상하기 전까지 그는 대중가요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연습생 생활도 했다. 무려 8년여의 긴 시간이었지만, 가수로의 데뷔는 녹록치 않았다. 결국 취업하여 일반 직장에도 근무해봤지만, 가슴 속에 이미 차오른 꿈과 비전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오랜 연습생 생활에 부모님은 반대 한 번 하지 않으셨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니 죄송한 마음이 컸죠. 눈치를 전혀 주지 않으셔도 눈치가 보였습니다.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마음도 들지만, 기도하면서 잘 될 거라 믿고 이 길을 갑니다.”

그의 믿음의 고백에 목회자인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죄송함의 마음이 가득 묻어나왔다. 이제 그의 최종 꿈은 위로를 전하는 찬양사역자다.

그는 “제가 아파 보니 투병 중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공감이 된다. 아플 때는 같은 노래를 들어도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더라”며 “특히 어르신 분들, 병원에 계신 환우분들을 위해 찬양사역으로 봉사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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