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 목양칼럼] 고난주간을 앞둔 기도

  • 입력 2018.03.25 10:0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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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저는 누구보다 고난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세상말로 팔자가 '쎈'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 때문에 주님을 더 가까이하고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교회 권용관 장로님이나 홍윤기 목사님처럼 천성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니까 믿어야겠지만, 홍윤기 목사님이나 권용관 장로님은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거든요.

저는 지금도 매순간 긴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정말 저는 광야의 싯딤나무나 선인장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싯딤나무와 선인장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두 편이나 썼겠습니까?

 

먼저 ‘싯딤나무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메마른 광야 뜨거운 바람만 불어오는 지평선 /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의 사막에 서 있는 / 보잘 것 없는 싯딤나무 / 가지가 구부러져 쓸모도 없고 / 가시가 많아 사람도 다가오지 않는 / 그 어느 것 하나 쓸데없는 싯딤나무 / 그러나 주님은 그 쓸모없는 싯딤나무를 꺾어 / 법궤를 만들라 하셨네 / 주님 나도 싯딤나무가 되게 하소서 / 이 쓸모없는 죄인 가시로 가득한 교만 / 주님의 손으로 다듬어 영광의 성전 쓰임 받게 하소서”

 

다음은 ‘선인장’이라는 시입니다. 

“타는 사막에서 / 오늘도 땅 속 깊이 /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 몸부림치며 / 바늘보다 날카롭고 뾰쪽한 / 가시의 가시를 / 돋구어 내고 있습니다 / 태양을 원망하거나 / 사막을 탓할 겨를도 없이요 / 하지만 이런 나도 / 봄이 오면 당신을 위해 /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을 / 알고 계시나요 / 당신만을 향해 / 상큼하고 매혹적인 / 꿀을 낸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 가까이 다가와 주세요 / 다가와 보지만 마시고 / 가만히 가만히 안아주세요”

 

저는 젊은 날 싯딤나무요, 선인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숨도 쉴 수 없는 그 고난의 광야를 지나면서 껍데기가 벗겨지고 가시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싯딤나무 가시가 벗겨져 성전의 법궤를 만드는 재목이 되었던 것처럼 저도 깎이고 다듬어져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백향목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알레고리적인 교훈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싯딤나무나 선인장처럼 고난의 광야를 걷게 하시더니, 지금은 백향목처럼 다듬어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 재건을 위해 써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큰 교회로 부흥을 이루고 대형교회 목사가 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날 반기독교 세력의 사상전, 영전, 문화전에 맞서 싸우는 용사로 쓰임 받게 하신 것이 더 감사한 것입니다. 다시금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제 앞에 있던 고난의 길은 끝이 없을것만 같았습니다. 가도 가도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고 사막의 신기루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좀 더 걸어가서 물이 보이면 강인 줄 알았는데 또 절망의 강이고, 고독의 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나긴 고난과 고독의 광야와 강을 지나면서 맹수처럼 달려들어 한국교회를 물고 찢으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사상전, 영전, 문화전과 맞서 싸워 이겨낼 수 있는 거룩한 야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미투운동이 폭풍이 되어 휩쓸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충분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과 고독의 광야가 가지치기를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위해 받았던 고난의 열매를 따 먹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사람인가. 지금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고난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요즘은 목숨을 걸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타이거 스타일로 은혜 받고 서바이벌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현재의 성공에 도취되거나 안일하여 세속적인 마인드나 스칸디 스타일에 빠져 있지 않으려고 늘 점검하고 몸부림칩니다. 아니, 일부러라도 고생을 사서하려고 합니다. 강박관념에 빠질 정도로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주님의 일을 만들어서 합니다. 주변에서는 제발 쉬라고 하지만 저는 주님 앞에 쉬는 것조차도 송구하고 죄송해서 스스로 고난의 광야를 찾아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을 앞에 두고 오늘도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이 종은 안일함이나 평안함이 아직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번 한 주간도 더 고난의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그 고난의 광야에서 고통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걸어온 편안하고 안일한 벤치마킹(Bench Marking)의 길이 아니라 그 길이 힘들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새롭게 미래를 개척하는 퓨처마킹(Future Marking)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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