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의사도 병원 문을 나서면 언제든지 환자가 되어 병원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줄 안다. 의사들이 가운을 벗어 던진 것이 꽤 오래된 듯싶다. 시중의 범부(凡夫)들이 볼 때는 그리 오래 가야 할 것 같지 않은데 너무 오랜 시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쏟아붓는다는 느낌이 든다. 황차 가족 중에 중병을 앓고 있는 이가 있거나 급히 수술이라도 해야 할 경우라면 그 느낌은 더할 것으로 안다.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 중요한 것은, 의사(醫師)의 사(師)가 왜 ‘스승’ 사인지 알기나 하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병을 고
부활절을 보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장안의 내로라하는 어느 일간 신문의 한 페이지에는 이 시대의 잠든(?) 목회자들을 깨우는 소리 같은 신선한 충격이 전해졌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성도 수가 2만여 명에 달하는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큰 목회를 하고있는 여성 목사 한 분이 자신의 사유 재산인 수 십억원 짜리 건물을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은퇴를 하면서 퇴직금과 관련하여 그리 아름다운 뒷얘기를 남기지 않는 시대임을 감안하면 현직에 있는 목사로서 매우 용기 있는 결단임과 동시에, 중요한 것은 그의
누가 봐도 정신이 똑바로 든 사람이라면 고개를 저어야 할 인물을 막상 선거에서는 다수의 유권자가 이를 지지하여 의회로 들여보내는, 그래서 그 잘못을 더 이상 묻기 어려운 자리에 앉히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의 됨됨이나 도덕성을 가지고 판가름해야 할 선거 본연의 목적이 사라지고 단지 인기(人氣)있는 인물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부정이나 부도덕성을 감추어 준 것이 아닌가 한다.지난 4월 10일에 끝난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는 누가 누구의 덕을 보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냉정히 판단해 볼 때 대한민국의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교회는 또 한 번의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할 만한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불교계에서 작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나는 절로’라는 프로그램이 2030 젊은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 마련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소위 말해서 미혼 남녀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인데 그 인기가 가히 상상 이상이라고 한다. 불교계에서 하고 있는 행사라 자칫 불교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같으나 참가 대상은 굳이 불교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하니
세상살이에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느라 본의 아닌 막말(?)을 하는 실수를 더러 하기도 한다. 선의든 악의든 막말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나 어느 일에서건 더 이상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요즘은 신문이나 방송을 보기가 더럭 겁이 날 지경이다. 선거의 본래 목적이 이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대놓고 선거에 이기겠다고 상대방을 헐뜯는 막말을 퍼부어대는 것은 문화 국민, 문화 사회를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옳지 않아 보인다.그것도 그냥 막말이 아닌,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서 모략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대체로 관망을
세상 곳곳에 축제가 넘쳐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런 것도 다 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성경(聖經)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금하고 계신 동성애를 조장하고 그것을 즐기려는 자들의 순수하지 않은 모임을 일러 그것을 ‘퀴어(queer) 축제’라고 한다니 참으로 말문이 다 막힐 일이다. 퀴어(queer)의 본래 뜻이 ‘기이한’이라 하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참 기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외형으로 남장(男裝)을 하거나 반대로 남자가 여장(女裝)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이한 일인데 하물며 동성(同性)
세상이 좀 시끄럽게 돌아가는 사이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챙겨줄 사람도 사라진 것 같다. 세상 모든 돌아가는 모양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의 사회면 한구석을 장식하는 살인과 공갈 협박은 물론, 뒤틀리고 깨어지는 가정사에서부터 사람의 위계(位階)를 뒤집어놓는 갖가지 하극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것 같다. 일부 연예인들의 빗나간 사생활 정도는 이제 별로 관심도 없다.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탈이 인기를 끌어 올리는 것 아닌가 한다.문제는 이 모
부활(復活)이란 글자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은 믿는 자들이라면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믿고, 또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여기까지뿐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사실은 우리의 육신이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정도로 믿음의 모든 것을 결론 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부활에 대한 진정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
출세(出世)라는 말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따져 보면 그냥 단순히 ‘세상에 나왔다’는 말인 것 같은데 속내는 그게 아니라서 좀 얘기가 복잡해진다. 우선 세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속뜻은 ‘권세를 얻었다’든가 ‘권력의 한 축에 기대게 되었다’는 뜻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가장 적절한 말뜻을 찾을라치면 그래도 역시 사람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세상 사는 물리를 잘 익혀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 섰다는 말이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출세를 한다는 것은 여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고통도 따르는 인고의 세월을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 노아의 아들들로 인해 인류가 급격히 불어났다는, 성경을 기초로 한 얘기가 정설로 굳혀져 오고 있는 것 같다. 홍수 심판 사건 이후 등장하는 이슈의 중심에는 바벨탑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노아의 자손들이 복을 받아 수(數)가 많아지고 세력이 왕성해져 그들이 한데 모여 지난날의 기억을 반추해보는데 화제의 중심에는 역시 기억에도 생생한 홍수 심판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서로 의논하던 차에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데 뜻
어느새 3월의 중반을 지나면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의 변화는 확실히 선거 분 위기가 험악해져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야 할 것 같다. 좌건 우건 진영의 논리를 떠나 우리 사회의 특징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죽고 살기 로 헐뜯는다는 점이다. 누구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이념이나 신념이 같을 리 없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극단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와는 다르지 않느 냐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서는 어 느 분야의 생각이 옳다든가, 다른 어느 부문에서는 나와 다른 것 같다는
매우 아쉬운 얘기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말을 주위에서 들어야 했다. 근자에 지방의 어느 곳에서인가 어느 목사가 장애인 부부를 데려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명목으로 노동력을 갈취해왔다는 소식이 공영방송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져 논란이 되고있는 것 같다. 조사 결과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노동력을 갈취한 정도를 넘어 감금과 폭행까지 했다니 참 왜 이랬을까 하는아쉬움이 있다. 소식을 들은 이웃 주민들이 하는 말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지금이 어떤 시대이냐를 떠나 목사로서는 해서는 아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겠다는 속내는 쉽게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옛말에도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편에서는 ‘의사 찾아 삼만리’ 경주가 벌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건만 흰색의 눈부신 가운에 가려져 이런 소식들이 차단되고 있는지, 여러 날이 되도록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진작에는 몰랐으나 이쯤에서 알고 보니우리나라 의료체계가 세계 으뜸이라고 한다. 그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의료진은 현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이미 우리 사회에서 가
참 경건이 과연 한국 교회에 있는가 하고 물으면 대답이 좀 궁해지지 않을까 한다. 또 한해의 새로운 봄이 돌아와 여기저기서 사순절의 표어를 내걸고 있는 모습이 진정 아직은 한국에 교회가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엄밀히 ‘참 경건’의 의미를 새겨보노라면 현실이 잘 따라 오는 것 같지는 않다. 사순절 행사의 면면을 보아도 어디서 누가 판(?)을 벌리든 사순절 행사라 해도 여전히 크게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어느 이름난 목사나 부흥사의 자기 이름 날리기(?) 위한 행사의 성격에서 크게 넘어서는 것 같지 않기
참으로 충격이다. 충격이지만 국민 누구나 이를 공감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새로 지은 주택 10채 중 9채가 아파트였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시대적 변화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우리나라가 아파트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파트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원인은 일찍이 전후(戰後)에 베이비붐 시대를 맞으면서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라 좁은 국토에 주거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아 골머리 앓던 위정자들이 찾은 돌파구가 아파트였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이제 아파트가 우리 사회의 대표 주거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내로라하는 이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나쁠 것 없지 않느냐고 강변(强辯)할 사람들 또한 많으리라 짐작은 한다. 그래서 그런가 한국에는 교회도 많고 교단도 많다. 다 같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교단이 많이 생겨나면 좋은 점도 있겠으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결론적으로 그만큼 분열도 적지 않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그리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그 모양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으레 들을 수 있는 말이 ‘야, 너 예수 믿는다더니 기껏 이거냐?’ ‘너 돈 벌어서 뭐 했니? 예수한테 다 갖다 바치고 남은 건 없니?’ 하는 등등의 다소 모욕적인 말인 것 같다. 제대로 돈을 모아놓지 못했다거나 아직 취업도 하지 못한 젊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대답하기가 참으로 난감한 상황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 시대에야 되도록 믿는 자라 하더라도 젊은이와 부딪쳐 봐야 별 남는 것 없을 거라고 하는 계산 때문에 오고가는 말도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믿는 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
성도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의 이야기, 내게 주시는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이고 남이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즘처럼 설교가 홍수를 이루는 때가 과거에는 없었다. TV는 물론 유튜브라고 하는 매체까지 등장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설교가 홍수를 이룬다. 쉽게 말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열 번도 더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과거 우리의 선진 신앙인들이 겪었던, 설교가 갈급했던 시절을 상상해보면 지금 시절은 사방에 설교가 넘친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 아닌 가 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테 러가 채 잊히기도 전인 것 같은데 이번 엔 여당의 젊은 여성 국회의원에 대한 테러가 백주(白晝)에 저질러졌다. 그것 도 성인이 아닌 중학생에 의해서이다. 테러를 자행한 본인은 스스로 ‘나는 촉 법소년이다’ 하고 주장했다는 것이 더 욱 심각한 일로 보인다. 알다시피 ‘촉법 소년(觸法少年)’이라 함은 형벌을 받을 만한 행위라도 14세 이하는 벌하지 아 니한다는 형법상의 형사책임 능력이 없 음을 인정하는 제도이다.제도상으로야
도하 각 신문이나 방송 등은 물론이고 반정부 성격을 띤 언론매체들에서 더욱 유난을 떠는 이른바 대통령 부인 명품백 사건이 사실은 한 목사가 미리 준비하고 실행한 연출에 의한 것이었다니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차제에 목사에 대한 심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 격언에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듯이 ‘목사면 다 목사냐 목사다워야 목사이지’라는 말로 결론을 대신하고 싶다.사건의 전말에 관하여는 이미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져 세상에 회자되고 있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으려니와 꼭 하고 싶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