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모르파티

  • 입력 2021.03.04 11:13
  • 기자명 컵뉴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동훈 목사.jpg

임동훈 목사 (예수나라공동체)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 /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 세상에 뿌리며 살지 /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 인생은 지금이야 / 아모르파티 …” 2013년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첫 가사다. 라틴어 사랑(아모르)과 운명(파티)의 합성어로 ‘운명을 사랑하라(Love of Fate)’는 뜻이다. 이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개념으로 운명애(運命愛)를 드러내고 있다. 불가측 고난이나 시련에도 낙망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잘 대응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한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산전을 개간하려고 먼 친척의 동산에 불을 놓았다. 산주 할아버지가 연기를 보고 멀리서 찾아 올라왔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책망할까 싶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뭐라고 얘기하자 고개만 몇 번 끄덕인 후 그대로 내려갔다. 그의 모습에서 선비 정신을 보았다. 거기 메밀을 뿌렸다. 메밀꽃이 눈꽃 바람처럼 일렁거렸다. 아버지가 일할 때, 나는 송구를 꺾으려고 나무에 올라갔다. 낫으로 가지를 찍다가 검지를 찍었다.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처음으로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아버지가 송구껍질을 벗겨 손가락에 탱탱 감아주었다. 이후상처는 나았으나 1㎝가량의 허연 흉터는 평생을 함께하였다. 사춘기 시절에는 기관 열등감으로 다가와 누가 볼 새라 늘 조바심을 피웠다.

그리고 종기 같은 피부병이 자주 생겨 창피하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페니실린 주사를 한 방 놓아주었다. 부스럼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순박한 농부였다. 또 옻을 잘 탔다. 옆집 언덕에 큰 옻나무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옻이 오르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허벅지에 옻이 올라 걸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가 그 개꼴만 보이고 왔다. 그렇게 3번이나 조퇴하였으나 다행히 6년 개근상을 받았다. 우등상은 기본이자 짝꿍이었다. 실로 나는 IQ 155짜리 수재로서 자자하게 칭찬을 받았으나, 무심한 세월 앞에 무릎을 꿇고 바보들의 행진만 계속하였다.1 962년 조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은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졌다. 증조부와 조부 3형제의 유산을 아버지가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땅을 취한 사람은 새집을 지어 이사하였다. 그는 촌수 없는 외척으로 어머니가 오빠라고 불렀으나 우리 집과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가 술만 마시면 돌멩이를 주머니에 숨겨 와서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할머니가 그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두세 번 정도 되뇌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을 주먹으로 쳐 코피를 터뜨렸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하였다. 할머니가 학교 앞 신작로에 점방을 차렸다. 마을에서 유일한 판잣집 가게로 벌이가 짭짤하였다. 이후 김신조 사건으로 외딴곳에 살던 사람들이 소개 당해 이사를 왔다. 주민이 조금 늘어나자 점포가 5개로 불어났다. 장사가 신통치 않자 3개가 문을 닫았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 없다.” 유대인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 1929~2016)가 1975년 출간한 저서<운명>에서 한 말이다. 14세 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1년만에 종전으로 풀려났다. 직접 겪은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13년간 집필하여 운명을 바꾼 작가가 되었으며, 20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운명의 씨앗을 뿌려 자유의 열매를 거둔 작중 주인공이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4)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