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칼럼] 눈을 바라보며

  • 입력 2022.01.20 09:54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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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목사 (아름다운교회)
[프로필]
▣ 순복음 신학교 교수
▣ 前 일기연, 42대 고양시기독교연합회장
▣ 사랑이 있는 마을 담임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숲속 통나무집에 눈이 내립니다. 아름다운 마을의 설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겨울의 낭만은 단연 눈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눈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리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경이롭습니다. 눈을 대하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눈싸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눈을 어떻게 치우나 낭만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나이 먹었다는 증거인가 봅니다. 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눈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시는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눈이 하얀 이유는 광선이 작은 가루 속으로 들어가서 통과하지 못하고 표면에서 광선을 여러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산란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깨끗합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리는 눈을 보노라면 우리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습니다. 눈의 특징은 희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세제들이 너무 좋아서 온갖 때와 얼룩을 다 지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세제라도 우리 영혼의 더러움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 2: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죄를 지적합니다. 죄를 짓고 나면 금욕을 하고 수양을 해도 죄에 대한 양심의 소리는 잠재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속죄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을 때 죄 씻음을 받을 수 있고 양심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혈로 씻음 받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보시기에 눈과 같이 희어질 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죄,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몬 살인죄를 짓고 나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면서 시편 51편을 남겼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은혜는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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