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

  • 입력 2019.07.04 14:10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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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동욱 목사(예정교회) 

창세기 5장 1~2절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본질이라 함은 사물의 본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으로서 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무엇인가?’에서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성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는 촬영하면서 NG도 내고 리허설을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없기에 매일 최후의 날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서 살면서 못다 한 일을 하나씩 이루고자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니 잘못 산 것이 너무 많았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본질을 놓치고 살아온 자신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나, 창세 이후 초기 인류에게나 똑 같이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목숨은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5장을 중심으로 삶의 본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삶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신앙의 유업을 이어가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담은 가장 먼저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이후에 셋을 낳았습니다. 그 외에도 그가 구백삼십 세를 사는 동안 많은 자녀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에게 딸들이 없었었다면 그 후손들이 결혼해서 자손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를 이야기하는데 오직 ‘셋’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는 창세기 5장 6절 이하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아담 후손들의 족보가 이어지지만, 이 족보 또한 반드시 장자가 아니라 신앙의 계보를 따라 이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담의 계보만 해도 신앙의 자손인 셋과 불신앙의 자손인 가인이 갈라졌습니다. 셋의 자손 중에서도 신앙의 길로 가지 못하고 곁길로 간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서 노아의 계보까지 이어진 이 족보는 신앙의 족보가 기록된 것입니다. 아담에서 출발해서 셋을 거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지킨 집안보다 불신앙으로 흘러간 집안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노아 시대에는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했고,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성도들이 신앙의 족보를 이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장자로 태어났느냐, 차자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유업을 누구를 통해서 이어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그로 말미암아 신앙의 유업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신앙의 족보가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대를 물려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본질입니다. 다른 것은 다 이루어도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계보를 잇지 못한다면 훌륭한 부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장인’이라고 해서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원조’라거나 ‘40년 전통’이라고 하면서 전통을 마케팅으로 하는 곳이 많이 생겼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은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대물림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대물림입니다. 삶의 본질이 장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랑 소통하며 사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소통하고 있는 것이 곧 그 사람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고위층은 고위층끼리 소통하고, 재벌은 재벌끼리 소통합니다. 깡패는 깡패끼리 소통합니다. 그 세계는 문화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누구랑 소통하는 것이 가장 삶의 질이 높을까요? 하나님과 날마다 소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사는 것이 가장 복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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