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17)

  • 입력 2019.08.02 15:36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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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수 목사
▣ 영월주님의교회 

▣ 전 터키 선교사 

바다라((Πάταρα, Pttara)

터어키 남서쪽 크산토스(Xanthos) 강 입구에 위치한 바다라는 항구도시로 로도스 섬에서 약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 도시는 헬라시대에 고대 루기아(Lycia)에 속한 성읍으로 태양신인 아폴로를 숭배하였다. 따라서 ‘바다라’라는 지명의 이름은 태양신 아폴로의 아들인 파타로스(Πάταρος)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였던 헤로도투스(Herodotus, c. 484~c. 425 BC)는 바다라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의 활발한 신탁(Oracleof Delphi)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한편, 지리적으로 아름다운 천혜의 항구의 기능을 가진 바다라는 일찍이 해상 무역을 통해 아나톨리아의 내륙과 교역이 활발하여 기원 전 4세기 초에 이미 주화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기원전333년 알렉산더 황제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모든 도시들을 점령함에 따라, 이 도시는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의 휘하의 장수인 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도시를 화려하게 단장하고 확장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주요 항구도시로 건설하고 무역업에 종사하는 자들과 소아시아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편안한 숙박시설을 제공함으로써 당시 6개의 루기아 동맹 연합 도시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세월이 지나 43년, 바다라는 로마제국에 편입되게 되었는데, 이후 이 항구 도시는 행정상 밤빌리아 주에 속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은 이곳을 배가 쉽게 정박할 수 있도록 편리한 항구 도시로 만들고 해상 무역을 통해 항구에 곡물을 저장하고 내륙에 물품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활발한 기능을 감당하게 하였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행정상 터키의 안탈리아 주에 속해 있는데, 비쟌틴 시대에는 우리에게 최초의 산타클로스로 잘 알려진 성 니콜라스(St. Nicholas)가 활동했다고 하는 ‘무라’(Myra)라는 도시와도 인접해 있다. 하지만 ‘무라’(Myra)에서 산타클로스로 활동하던 성 니콜라스는 본래바다라에서 출생(270 AD, 03, 15)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제국이었던 비쟌틴 시대에는 이 도시가 무역상들이 자주 왕래하고 사도 바울의 여정을 따라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객들을 위한 중요한 성읍으로 여행객들에게 편안한 숙박 시설을 제공하였던 곳이다. 하지만 화려했던 이 도시는 1211년 기울어 가는 비쟌틴 제국에 맞서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전신인 셀죽 터어키족에게 점령당하게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아쉽게 사라지고 만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여행길에 고스와 로도를 거쳐 배를 환승하기 위해 이곳 바다라 항구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행21:1)하지만 종교 개혁자였던 칼빈의 후계자로 칼빈과 함께 종교개혁의 선두에서 싸웠던 베자(Théodore de Bèze)의 사본(Codex)에 의하면 사도행전 21장에 나오는 지명들 가운데 바다라 뒤에 ‘…와 무라’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사도 바울 일행이 배를 갈아탄 곳은 바다라가 아니라 무라에서 갈아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바다라와 무라는 가까운 도시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바다라는 터어키어로 ‘게레미쉬’라고 하는데, 아직도 주변에 크산노스 강이 흘러 비옥한 농경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과거에 배가 드나들었던 항구에는 모래가 많이 쌓여 더 이상 배가드나들 수 없어 지금은 항구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잊혀진 역사 속에서도 항구로 향하는 폭이 12m가 넘는 넓은 바다라의 중앙로와 로마 시대의 목욕탕, 아폴로 신전과 원형극장은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에게 이 도시의 규모면에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한편, 2009년 이곳 가까이에 위치한 아크데니즈 대학교(Akdeniz University) 고고학과의 발굴팀은 이곳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언덕에 세워진 헬라 시대의 아폴로 신전의 일부와도자기, 그리고 로마시대로 추정되는 원형극장의 잔재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성벽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을 발견함으로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도심에서 약 2km 떨어진 1세기 로마 시대에 세워진 세 개의 아치 모양을 한 ‘개선문’(Mettius Modestus)과 1991년에 발견된 1세기 초로 추정되는 반원형을 한 국회 의사당은 약 500년간 리기아 동맹을 위한 국회의사당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온 바다라 항구는 현재 밀려오는 파도에 실려 온 모래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길이가 12km나 되는 길고 아름다운 파타라 해안을 걸으며 사도 바울의 선교적인 마인드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가 이곳을 지나며 선교하였던 바다라 성읍이 시대가 바뀌어 현재 이곳에 이슬람교의 집회 장소인 모스크가 곳곳에 세워져 있음을 보면서 쉽게 성지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선교 전략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선교적인 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오늘도 이곳 소아시아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무슬림 선교를 감당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늘 기도가 절심함을 깨닫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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