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 선조들의 글, 문집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문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번역된 자료를 중심으로 읽었다. 그들의 글, 문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참으로 책읽기와 글쓰기를 치열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책읽기가 있었기에 글쓰기도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종종 놀란다. 우선은 어떤 선비의 문집은 양이 방대하여서 놀라고, 어떤 선비는 시시콜콜한 것조차 기록으로 남겨서 놀란다. 이를테면 어디를 다녀오면 반드시 기(記)를 남겨야 되고, 어떤 경험이나 생각이 났다고 하면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식이다. 선비 글인 문집에는 한시(漢詩)가 많다. 사람과 사람이주고 받은 편지도 많다. 자신의 생각, 주장을 글로 남겨서 수백 년이 흘러 오늘에도 생생하게 선비들의 삶과 생각을, 맑은 물에 비춘 내 얼굴 보듯 읽을 수 있었다.그런 인물 중 한사람인 다산 정약용의 고백을 보자. “나는 평소에 큰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글로 쓰지 않고는 못 견디고, 글을 쓰고 나면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는 못 견딘다.
생각이 떠오르면 붓을 잡고 종이를 펼친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써 내려간다. 다 쓰고 나서는 스스로 좋아하고 스스로 아껴서 글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내 글이 온전한지 편벽된지, 상대방이 나와 친한지 아닌지 헤아려 보지도 않고 성급히 보여 주려 한다.”(『다산의 마음』 인용) 또 한사람은 심노숭(1762~1837)일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뿐 아니라 보고 들은 것도 붓을 들어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미의 사람이다. 일종의 기록병에 걸린 사람이다. 그의 기록병의 산물이 『자저실기』(自著實紀)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선조들은 그랬다. 그렇다면 후손인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가? 무엇인가 남기려고는 한다. 사진과 동영상이 주이다. 어디를 다녀오면 흔히 하는 말은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진을 남긴다. 가끔은 여행기(記)를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비들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 난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글쓰기는 무슨 행사가 있거나 일이 있을 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글쓰기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고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간다. 사회에서 당장 부딪히는 것들은 글쓰기가 많다. 물론 그런 직종이 아닌 자들도 많다. 한번은 아는 지인이 모 단체의 한시적 리더가 되어서 어떤 행사를 하는데 자료집에 들어갈 인사말을 써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다. “그냥 생각을 정리해서 쓰면 되지 글 부탁을 하냐?”고 하니 “글쓰기 훈련이 안되어 쉽지 않다”는 대답이다. 이런 일은 많을 것이다. 읽은 책 제목이 『진정한 리더는 직접 쓰고 직접 말한다』가 있었다. 최근에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하버드, MIT 등과 우리나라 대학과 차이점 중 하나는 글쓰기 지도 교수가 있고 글쓰기센터가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40대에 접어든 직장인 1600명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