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 줄이기

  • 입력 2018.02.01 10:16
  • 기자명 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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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국 목사.jpg
 고병국 목사 (한소망교회)  
[프로필]
▣ 협성대학교 신학과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졸업
▣ 서울남연회 강동지방 감리사 역임
▣ 온맘 닷컴 “목회칼럼” 연재
▣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초나라 사람 중에 좋은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전혀 활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다. “자네가 잃어버린 화살은 천하의 명품인데 왜 찾지 않는가?” 그러자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대답했다. “초나라 사람이 잃어버리고 초나라 사람이 주우면 됐지 무엇때문에 이를 다시 찾겠는가?” 공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 했다. “그의 말 중에서 ‘초나라’라는 말만 빼면 훌륭하구나! 즉 사람이 잃어버리고 사람이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를 다시 찾겠는가?” 노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말 했다. “공자의 말중에서 ‘사람’이라는 말만 빼면 훌륭하구나! 즉 잃어버리고 주우면 됐지 무엇 때문에 이를 다시 찾는가?”어떤 것을 잃게 되거든 그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라. 그것들은 그 분이허락하신 동안만 잠시 맡아서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마치 길을 떠난 나그네가 잠시 여관에 머무는 것과 같이. 위 두 글은 우리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기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한다. 그런데 현자들의 글을 보면 잃어버린 것에 애태우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주운 누군가는 잠시 동안이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사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원하는 만큼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많아도 그것을 다 소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즉 원하는 만큼 소유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마치 덜어내는 것이 더 기쁘고 즐겁듯 말이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사람과 아무것도 빼앗길 것이 없는 사람 중 누가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가? 전자보다는 후자일 것이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구들 삼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마음이 편할 수 있다.일찍이 행복론자였던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생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욕망이다.

먹을 것, 입을 것 등이다. 둘째는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이다. 성적욕망이라고 했다. 셋째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이다. 첫째 욕망을제외한 대부분의 욕망이 여기에 속한다. 사치, 탐욕 등이다. 사람은 사실 첫째 욕망만 충족시키면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욕망을 충족하는 것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우리 인간이 첫째 욕망에 만족하며 살아왔다면 이 지구상에는 어떤 전쟁이나 폭력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전쟁과 폭력과 파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죄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욕심이다. 모든 욕심은 죄를 부른다.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했다. 그렇다. 죄의 뿌리는 욕심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때로는 우리가 헛되고 부질없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귀중한 시간과 인생을 허비하거나 허송세월을 보낼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현자답고 지혜롭게 사는 것인가? 원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에 자족할 줄 아는 지혜이다.

욕심은 인간을 노리는 덫이다. 조선후기 중인 이이엄(而已厂) 이라는 호(號)를 가진 자가 있다. 그는 장혼(張混, 1759~1828)이다. 가난하고 장애를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평생지>에 나오는 대목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평생지(平生志)> 일부이다.“꽃이 피면 바라보고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에서 쉰다. 과일이 열리면 따다먹고 채소가 자라면 요리를 한다. 유유자적하는 삶이 어찌 자연의 아름다움뿐이겠는가? 혼자 있을 때에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거나 옛 책을 보며 그 사이에서 뒹굴뒹굴하면 그만이다. 흥이 나면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면 그만이다. 손님이 오면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다. 흥이 넘치면 휘파람 불고 노래하면 그만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우물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옷을 입으면 그만이다. 해가 지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중략- 잘 살고 못 살고 오래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을 따르면 그만이다. 그래서 내 집의 편액을 ‘이이(而已)’라 하였다.”『서재에 살다』인용. ‘이이(而已)’는 이만하면충분하다는 뜻이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편액이 오래 동안 여운을 남긴다. 왜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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